테드
도망
삶이라는 광활한 바다에서 거친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 우리의 작은 배를 흔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풍랑에 휩싸여 좌초될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흔히 견뎌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립니다. 마치 거대한 파도 앞에 무력한 존재처럼, 그저 침몰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기만 하는 거죠. 하지만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는 닻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닻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벗어남(도망)'입니다. 모든 파도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가 조정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이 있습니다. 거대한 폭풍우 앞에 압도당하는 대신, 손에 닿는 돛을 조정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방향을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도, 파도의 충격을 줄일 수 있습니다. 힘겨운 현실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작은 것부터 시작해도 괜찮습니다. 오늘 할 일 목록에서 하나를 지워내고, 오랜만에 좋아하는 차 한 잔을 마시는 것. 혹은, 쌓여 있던 책을 정리하며 마음의 정돈을 하는 것. 혹은 답답한 마음을 친구에게 털어놓는 것. 이 작은 행동들이 모여, 우리의 마음속에 작은 섬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 섬은 안전과 평화를 선사하고, 다시 항해를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물론, 모든 문제가 하나의 작은 변화로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기력하게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작은 변화들이 모여, 삶이라는 바다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수 있게 말이죠.
힘들 때, 단순히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작은 변화들에 집중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작은 변화들이 모여 삶에 희망의 등불을 밝혀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다시금 넓고 푸른 바다를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밤님 안녕하세요!
두 통의 편지를 받고 나서 쓰는 글이라 그런지 조금 더 친밀함이 드는 기분이네요. 저만 그런게 아닌것 같아 더욱 기쁘네요. 마음이 어지러운 한 주를 보내셨을 때, 제 편지를 받아 조금이나마 힘을 받았다는 말에 정말 행복했어요.
혼자 산 시간이 길어질수록 온기 하나 없는 집에 들어가기가 점점 더 싫어져, 몸에 무리가 가도록 오랫동안 운동을 한다거나 무리하게 약속을 잡곤 했는데, 이제는 여름밤님의 편지가 오는 한 주간은 들뜬 걸음과 함께 집으로 향한답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여름밤님도 같은 위로와 따스함을 느끼셨다고 하셔서 너무 기뻤답니다.
글재주가 없는지라 서툴게 담겨있었을 제 감사함과 진심을 온전히 마음 깊이 받아주셔서 정말 감동입니다.
또 서정적인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회사에서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힘든 모습을 보이는게 점점 더 어려워져서 그런지... 이런 기회가 생기니 마음의 소리를 이렇게 주절주절 담아내게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제 투정섞인 글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올 한 해 갑작스레 많아진 업무와 높아진 강도로 여름밤님을 힘겹게 만드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말에 단순한 위로의 말보다는 조금 더 깊은 공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 역시 올해 업무를 포함한 너무나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한 해 였기 때문이라서일까요? 여름밤님의 고민이 남 일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나를 둘러싼 상황 속에서 겨우 중심을 잡고 있다가도, 때론 견뎌내지 못할 만큼 거센 파도와 같은 일들과 마주할 때면 나만 이렇게 약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럴 때면, 그 동안 억누르고 있던 불안과 근심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제 주변에서 솟아나 저를 괴롭히곤 했어요.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비슷한 일을 겪더라도 잘 이겨내는거 같고 대부분의 상황들을 잘 다루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말이죠.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속으로 나 자신을 내동댕이 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것과 세상은 불완전하고,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여러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겪으면서 내가 아니면 나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찾기 쉽지 않다는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저 내색을 안한다기보다는 그들도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는걸 알게 된 이후부터는 남과의 비교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는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다면 최선을 다해서 도망치는 방법도 배웠구요. 물론 이 도망간다는게 책임감 없이 모든걸 뒤에 내버려두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 연락도 끊어버린다는 건 아니에요. 그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한다는 뜻이랍니다. 마음가짐을 바꾸는게 가장 좋겠지만, 예수님이나 부처님과 같은 성인과 달리 대부분의 우리네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게 가장 어렵겠죠.
그렇기 때문에,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바꾸는 것보단 내가 있는 환경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에 집중했어요. 그렇게 하며 생긴 크고 작은 변화가 결국 지금의 안정적인 삶을 가져왔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 물론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너무나도 큰 고민이 저를 끝도 없이 괴롭히고 있지만, 누군가가 말했던것과 같이 끝까지 해보려고 해요.
결국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보단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는게 제 삶에 더 건강하기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만약 어떤 무엇이 또는 누군가가 여름밤님을 괴롭힌다면..! 전력을 다해서 도망치세요. 쫓아갈 엄두도 나지 않을만큼 최선을 다해서요.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되거든요.
그러면서 여름밤님이 말씀하신것처럼 불안한 스스로를 더욱 보다듬어주고, 사랑해주세요. 그러면서 더욱 단단해지고 커갈 수 있게 말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장판이 단단하게 굳어버려, 다 자란 몸을 가진 '어른'이라고 불리우고 있지만, 실은 여전히 물렁하고 외부의 충격에 쉽게 모양이 변해버릴 수도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어른이' 니까요.
이렇게 쓰고보니까 사실은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것 같아 조금 부끄럽기도 하네요. 사실 쉼없이 몰아치듯 다가오는 불안함과 외로움을 달래고자 아침에 출근 전 항상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육성으로 사랑한다. 예쁘다. 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이렇게 한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요. 처음에는 쑥쓰럽고, 이게 뭐하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제가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준 의미있는 행동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이것도 앞서 말한거처럼 제가 도망치기 위해 했던 행동 중 하나였지만, 결국에는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답니다.
나중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쯤은 해보시는걸 추천드려요. 루틴하게 나를 마주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거든요. 같이 전력을 다해서 도망쳐봐요 우리.
아참. 도망과 불안 등에서 이야기하다보니, 여름밤님이 추천해주신 불안을 이기는 철학에 대해서 생각이 났어요.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주문은 해놓은 상태에요! 회사에서 분기마다 책을 주문할 수 있게 포인트를 주는게 있는데, 어떤 책을 살까 한참 고민하다가 마침 여름밤님의 이야기를 듣고 주저없이 주문을 했답니다.
이 책이 여름밤님에게 제공했던 피난처를 제게도 기꺼이 내주겠죠? 나중에 책을 읽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기회도 있으면 좋겠네요.
단순히 편지를 주고 받는 정도로 이렇게까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질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갈수록 투머치토커가 되어가는 느낌이에요.
지난 편지에 적어주셨던 부분에 대해서 조금 답을 해보자면, 제가 다니는 회사와 일본어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진 않아요. 하지만 지주사가 일본에 뿌리를 두었던 곳이기 때문에, 배워두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긴 해요. 하지만 제가 일본어를 배우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일본어가 제게는 아쉬움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대학교를 일본언어문화학과로 입학했지만, 한자가 너무 어렵기도 했고,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와는 약간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광고과로 전과를 했었어요. 이 선택에 후회는 하나도 없지만, 일본어를 부전공으로라도 가져가서 계속 해볼걸이라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에요.
사실 저는 중학교 때, 주위에서 흔히 말하는 '오타쿠' 였답니다. 그냥 오타쿠 정도가 아니라 정말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같은 곳에 참여해, 그 어린 나이에 코스프레 심사위원 같은걸 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꿈이 이와 연결된 쪽으로 생겨났고, 애니메이션이나 영상을 만드는 쪽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 생전 하지도 않던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 이전까지는 제대로 그 어떤 것에도 집중도 못했던 제가 애니메이션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한 가지에 집중하고 끝까지 파고들 수 있는 근성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전교 꼴찌였던 제가 중학교 3학년부터 공부를 시작하면서 겨우,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공부 자체를 계속해서 집중할 수 있게 해준,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야말로 소중한 제 어린날의 한 축이 되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어를 놓아버린 아쉬움은 아직까지 마음 한 켠에 남아있었어요. 그러다가 올해 5월에 친구들과 오사카에 여행을 다녀오면서, 제 일본어 실력이 바닥을 쳐버린걸 다시한번 느끼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마음과 아쉬움을 아쉬움으로 남기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해보고자 다시 시작해보려고 마음을 먹은거랍니다.
여름밤님의 응원이 있었던만큼, 더욱 집중해서 적어도 제가 생각했던 목표까지는 내년에 가보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설사 잘 되지 않더라도, 여름밤님의 말씀과 같이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부분도 분명 있을테니까 말이에요.
여름밤님은 혹시 배우고 싶었던 언어가 있으셨나요? 아니면 취득해보고 싶었던 자격증이나 조금 더 깊게 배우고 싶었던 분야같은게 있을까요? 같이 공유해보면 의미있을거 같아요.
이전 편지에서는 하고 싶으셨던 목표가 스무개가 넘으셨음에도 열 개가 넘는걸 달성하셨다고 하셨는데요..!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사실 전 올해 목표가 많진 않았고, 큰 목표는 딱 하나 였는데 달성하지 못했거든요. 그 목표를 위해서 편지를 쓰는 오늘도 시도했지만, 결국 뜻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과욕이 부른 현재의 상황에 대한 질책도 하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내년에는 꼭 이룰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정진해봐야겠어요.
그리고 여름밤님과 같이, 여러 목표를 가져보고 삶에 활력을 불러올 수 있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면 꼭 다음 편지에 말씀드릴게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여름밤님이 추천해주셨던 신인류의 날씨의 요정을 들었어요. 목소리부터 노래의 가사까지 너무 큰 위로가 되었어요. 25년 유튜브 뮤직의 리캡에서 이 노래가 리스트에 올라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좋은 노래 추천해주셔서 감사해요.
단순히 편지의 활자를 통해 전달되는 여름밤님의 이야기가 그리고 제 이야기가 서로의 삶에 조금씩 스며들었다는게 너무 신기해요. 서로가 추천해준 노래를 들어보기도 하고, 책을 사기도 하고, 인생 영화라는 것을 찾아보기도 하고 말이죠. 지난번에 추천드렸던 영화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씀주신걸 봤어요! 제 기억으로는 넷플릭스에 있었는데, 지금은 내려갔을지도 모르겠네요. 저한테 블루레이 DVD파일이 있긴 한데, 전달드릴 방법이 없어서 아쉽네요.
오늘도 결국 분량조절에 실패해버리고 말았네요. 여름밤님께서는 길어져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좋은 글재주를 가진게 아닌지라 읽으시면서 머리 아프신게 아닐까 하는 고민에 조금 눈치가 보이기도 하답니다.
마지막으로 혹시 여름밤님께서는 1년 중 특별한 루틴 같은게 있으신가요? 저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생각난게 있는데요. 저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치킨을 먹고 있어요!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신다면, 저도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먹는건 아니라 답을 잘할 순 없어요. 하지만, 20살부터 지금까지 어쩌다보니 크리스마스에는 꼭 치킨을 먹었었어요. 이게 습관이 되고, 제 나름의 연례행사가 되면서 한 해의 마무리겸해서 꼭 치킨을 먹게되었답니다.
조금 웃긴 얘기일 수 있긴 했지만, 여름밤님도 이런 혼자만의 의식이나 연례행사 같은게 있는지 궁금하네요.
저에게 있어 크리스마스의 치킨은 한 해의 끝을 의미하는 만큼 벌써 지나간 24년의 유종의 미를 거두고 잘 정리해봐야겠네요.
여름밤님께서도 올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다음에 여름밤님에게서 올 편지는 25년이라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해요.
아마 크리스마스가 껴있고 해서, 이 편지가 제가 생각하는것보단 늦게 전달될것 같은데 아마 한 주의 끝에 가까워질때가 아닐까 싶네요.
곧 주말일테니 조금만 더 힘내시고, 길에서 실제로 스쳐지나가도 모를 저희지만... 그럼에도 이 땅 어딘가에 진심으로 여름밤님을 응원하고, 반대로 편지에 따뜻함을 전달받는 테드라는 편지친구가 있다는걸 잊지 말아주세요. 언제나 응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4. 12. 23, 테드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