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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자몽 Dec 09. 2019

갈아 만든 엄마


얼마 전 어린이집에서 하는 부모교육을 다녀왔다.

'모성'을 주제로 하는 교육이었고,

아이와의 행복한 관계 형성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놀이 방법을 알려준다고 소개가 되어 있었다.

평소 놀이 방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편이라(전혀 객관적이진 않겠지만, 나는 얘네랑 신나게 노는 건 자신 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임했더랬다.


부모교육의 도입부는 이러했다.

흔히들 '모성'과 '모성애'를 동일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엄마에게 무조건 '모성애'가 있는 것은 아니며, 자녀의 주양육자에게서 발현되는 것이다.

또 '모성애'의 크기는 양육자가 현재 처한 상황, 기질, 행복지수와 같이

육아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엄마의 모성애를 높이기 위해서는 엄마가 육아하는 과정에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며,

이와 같은 맥락으로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모성애를 높이는 주요 변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에잇 이런 귀한 정보를 매번 나 혼자 듣는다는 게 억울하다. 이런 얘긴 이렇게 남이 좀 해줘야 하는데. 내가 얘기하면 지 좋은 얘기만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단 말야.)

그리고는,

육아를 시작하며 스트레스였던 것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들을 생각해보는 시간들도 가졌다.


아 이거 엄마들을 위로하는 그런 서타일의 부모교육이었고나.


흥미가 있었다.

엄마는 자고로 모성애가 있어야지! 하는

엄마를 죄책감에 사무치게 하는 그런 클리셰가 없는 '모성'에 관한 이야기라 그러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결국 또 신파로 흘러갔다.

나는 가족 영화를, 드라마 장르의 영화, 가족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맘대로 자주 터져버리는 이노무 눈물샘을,

안 그래도 엄마가 되고 나서 더 나의 딸 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나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고도 결국에는 아직도 엄마 먼저가 되진 못하는 여전한 딸인 나를,

아주 그냥 방류 댐으로 만들려고 작정한 것 같은 그런 이야기를 나는 정말 안 좋아한다.


클리셰의 끝내기 홈런은 마지막 '엄마'에 관한 영상이었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합니다.
       나는 엄마가 아침잠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한 경음악과 함께

무채색으로 된 몇 컷의 그림들,

그리고 엄마에 대한 묘사들.




아니, 엄마 위로하는 거 아니었어?

난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 준비 안 하는데?

난 아침잠 많은데?

나도 너어어어어어무 졸린데?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밥 준비 안 하면 엄마가 아닌 거야?



그래,

그 영상의 의도도 부모교육의 의도도 그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내 안에 자격지심이 빚어낸 비약적인 삐딱선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나에게 이 전업주부, 전담육아의 시간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도 매번 부족한 것 같고,

피곤하다고 해도 낮잠을 자면 등원시킨 아이들에게도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 그에게도 양심 없는 일 같고,

살이 찌면 탱자탱자 속 편하게 노니까 살이 찐다 그럴까 봐 스트레스지만 살은 정작 못 빼는,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나면 그 시간만큼 정돈되지 못한 집과 준비되지 못한 식사 준비 때문에 괴로운,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보내지만 어떤 이들에겐 팔자 좋은 소리 한다는 말을 듣게 되는,

김지영에게 공감했지만 그에 대한 악플에는 또다시 의기소침해져 버린,

작은 일에도 인정받고 싶어 안달 난 듯한

내 인생 가장 약자이자 쭈글쭈글한 시간이다.


그래서 난 싫다.

짜장면이 싫다고 하는 엄마도 싫고,

생선 머리를 가장 좋아한다는 엄마도 싫다.


짜장면이 너무 맛있지만

나의 그 친구들이 잘 먹는다면 난 기꺼이 다 줄 것이다.

생선구이가 기가 막혀도

나의 그 친구들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난 언제든 내어줄 것이다.


그러니까

그래야 한다고는 말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 엄마라고 하진 않았으면 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갈아 넣으라고 하진 않았으면 한다.


그러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충분히 기꺼이 언제든 반드시 무엇이든 나를 갈아 넣을 테니 말이다.


그냥 적당히 청소기를 돌리고 사람이 살아갈 정도로 청소를 하며,

집요리와 밖요리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내고,

아이들이 집에 오면 신나게 같이 까불기도 진실의 방에 소환하기도 하고,

함께 재미있는 영화를 보며 ost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가사도우미와 나 사이의 정체성의 경계를 위해 나 자신도 키워내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아내도, 좋은 엄마도,


좋은 나도 될 수 있다.


그렇다.

아마도 나는.



갈아 넣고 싶지 않은 갈아 만든 엄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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