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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낭만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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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자몽 Aug 08. 2020

누구도 별 관심 없지만 사실은 매우 어마어마한 이야기.

나는 밥을 먹고, 씻고, 이동을 하고, 잠을 자는 시간 이외의 대부분의 시간을 노는 사람이다. 심지어 내가 직접 참여하여 놀지 못하는 순간에도 어떻게 놀아야 잘 놀까를 궁리하며 사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겠는가?


나는 연년생 딸을 둔 엄마이자, 유아교육을 하는 교사이다.

소위 온통 노는 애들에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인 셈이다.


잠깐 재미없는 이야기를 좀 얹어보자면,

2020년엔 새로운 교육과정이 도입되었다. 이름하여 놀이중심 교육과정.

개정 누리과정에서는 그동안의 누리과정의 획일적 운영이나 교사가 계획한 자유선택활동 중심의 놀이 운영에서 벗어나 유아가 주도하는 놀이를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유아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유아의 놀이를 잘 아는 전문가인 교사의 자율성을 존중함으로 유아와 함께 실천하는 교육과정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혹자들은, ‘아니 지금보다 그럼 더 많이 놀다 온다는 거야?’

‘도대체 그렇게 놀기만 해서 앞으로 학교 적응은 어떻게 하겠어.’ 한다.

그렇지. 그럴 수도 있지.

유아교육이란 학문을 공부하고 시험을 통과하고 수많은 아이들을 현장서 계속 만나보고 있는,

(그래. 조금 허세 첨가하여)이 유아교육 전문가조차도 엄마로서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긴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노는 것에 대해 꽤나 회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 쟤? 학교 때 엄청 놀던 애잖아.’라든가

최근 피디의 센스 있는 연출과 구성, 출연진들의 활약으로 미화되었지만 사실은 다소 그 행위에 대해 비꼬는 뉘앙스가 그득히 함축된  ‘놀면 뭐하니’ 하는 말 같은 것들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만약 당신이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주의 깊게 지켜본다면,

그 속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표정과 언어들을 목격한다면,

그 안에서 어떤 협상이 이루어지며, 어떤 중대한 결정과 규칙 그리고 스크립트가 생겨나는지 보게 된다면,

정말 깜짝 놀랄 것이다.


그것은 ‘허허 고 녀석들 참 재밌게도 노는구나.’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

바로 그 아이와 대면하는 시간이 된다.


즐거운 놀이 속에서 그 아이는, 진짜 그 ‘아이다운’ 그 아이가 된다.


수수깡을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 만들어낸 달콤한 빙수는

대단한 끈기와 연출력의 산물이며,

동그랗게 만들어진 모루를 굳이 펴내고 해체하여 차려낸 한 끼 식사는

발상의 전환이자 수렴적 사고와 발산적 사고의 절묘한 조화이다.

유치원 이야기 나누기 시간에는 애꿎은 발만 만져대고 옆에 앉은 친구 머리나 잡아당기던 아이가 나뭇가지 몇 개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구성해낸 메뚜기를 본다면 그 아이를 누가 주의집중 못하는 아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5명의 아이가 2대의 장난감 헬리콥터라는 제한된 재화 속에서 이루어내는

협상과 협박, 거래는 또 어떠하단 말인가.

엄마 아빠 놀이 중에 그들이 쏟아내는 소재와 대사 속엔 엄마 아빠에 대해 혹은 엄마 아빠와 함께 가지게 된 다양한 표상들이 어마어마하게 내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사람을 향한 객관적 통찰이란 건 없다.

그저 그 사람이 보인 행동, 뱉어낸 말에 기대어 빚어낸 오류 가득한 담론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놀이 속에선 선입견이 깨어지고, 감춰져 있던 캐릭터가 드러나며, 그 아이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발현된다. 가시적인 자아가 아닌 진짜 색깔의 자아, 완전한 나다움이 실현되는 시간인 것이다.

이것은 놀이가 가진 자발성과 자율성이란 매력이 빚어낸 어마어마한 효과이다.


우리는 불과 10년 전엔 상상도 못 했던 현실을 어느덧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사는 급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지금의 세대가 1년에 거쳐 모아 온 정보와 지식을 단 1분이면 뚝딱 알아낼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간다. 더 이상 지식 정보의 양으로 승부하던 시대, 성인이나 교사에 의해 지식이 전달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우리의 다음 세대는 자신의 선택과 관심사에 따라 ICT 기술에 근거한 바이럴 교육을 통해 학습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했던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 앞에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진짜 중요한 것, 진짜 전해주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한 때이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머리 하나 가누지 못하던,

눕혀 두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겁이 나던 그 유리알 같던 존재가,

뛰고 구르며, 오르고, 춤을 춘다.

언어를 습득하고, 대화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열 자도 넘는 공룡의 이름을 외고,

1년도 더 된 경험을 소환하고 그림으로 표상해낸다.

이 모든 것들은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던 그들 다움에서 시작되었다.

그저 스스로 놀이하며 살아가고 즐기며 해낸 것들이고,

그들이 스스로 무엇을 또 해낼지는 정말 아무도 상상할 수가 없다.


5살, 4살의 딸들과 함께 보내는 주말은

라떼엄마와 2019 개정 누리과정 안에 몸 담고 놀이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교사 엄마 사이에서의 괴리로 직면하는 시간이다.

보자기 2개와 에어컨 리모컨 하나로 벌써 20분째 신이 난 두 딸을 보며,

한창 즐거운 저들만의 장을 강제로 파하고, 최대한 유쾌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한글 공부할 사람!!’ 하며 저들을 소환할까 하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물론 항상 유혹을 이기는 건 절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힘 또한 가졌으니까. 암 그렇다.)


라떼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살아온 엄마에게

아이다움을 믿고 함께 놀이하고, 놀이하게 한다는 것은

따귀를 때려가며 이성을 소환해야 할 정도의 어렵고 안 자연스러운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원래부터 호모루덴스이며

엄청나게 놀고 싶어 한다는 것,

노는 게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걸 말이다.


놀이하자.

놀이하게 하자.

Let’s play

Let me play again!

Stuart Brown: Play is more than fun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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