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한자몽 Jun 22. 2021

쓸모의 상대성


억눌렸던 2주간의 본의 아닌 격리를 마치고

총알은 없지만 나에겐 눈과 다리가 있기에 나름의 보복 소비에 나선 날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 매장에 들어서서 기웃대고 있을 때,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 셋이 들어왔다.

바지 쪽 섹션을 훑어보던 여자 한 명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일행을 불러 모았다.

‘어머, 이거 내가 좋아하는 바지인데!’는 말로 이 바지를 입어봐야 하는 이유에 대한 변론을 펼쳐내더니 이내 피팅룸으로 향했다.

잠시 후 피팅룸에서 나온 여자는 나의 옆 쪽에 붙은 전신 거울 쪽으로 다가왔다. 일행과 그 여자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 배기핏의 진청바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평소 일자 핏이나 보이프렌드 핏의 청바지, 게다가 그중에서도 진청을 너어어어어어무 사랑하는 나로서는 그 여자가 입은 모습이 몹시나 궁금했다. 하지만 같은 거울을 보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내 시선을 들킬 것 같아 쉽사리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옷을 몸에 대 보는 몸짓을 하며 힐끗 빠르게 스캔을 해보니 역시나 내가 좋아하는 짙은 청에 넉넉한 배기핏의 바지였다. 그 바지는 청바지를 입은 그 여자에게도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윗 셔츠와도 아주 잘 어울리더라. ‘나랑 취향이 비슷하시네. 예쁜 바지를 잘도 골랐네.’하며 나도 입어보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여자와 함께 온 일행들은 그들의 어조와 워딩을 동원하여 그 바지는 아니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음…… 뒷모습이 참 예쁘네.”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가진 의미는 설명하지 않아도 우린 알고 있다.

에둘러 바지의 뒤편을 칭찬한 그녀도 순식간에 얼마나 많은 표현과 단어를 골라야 했을까.

그리고는 고민 끝에 말을 이어가더라.

“근데 여기 앞이 좀 애매하다.”

“그래? 배기바지들은 다 이래. 이런 느낌으로 입는 거지 뭐.”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자신의 바지를 변호하며 나섰다.

그랬더니 나머지 한 명의 일행까지 합세하여 그 바지는 별로라는 말을 에둘러 하기 시작했다.  

바지를 입은 주인공은 그 바지가 꽤나 맘에 드는 눈치였지만, 안타깝게도 다수결은 힘이 세다.


에이씨. 안 되겠네.

내가 나설 차례인갑네.


아까부터 은근히 맘에 들었던 형광 연두 셔츠를 하나 꺼내 들고는 청바지를 입은 여자 옆 거울 앞에 섰다.

셔츠를 내 몸에 몇 번 대보고 이리저리 살피며 시간을 조금 쌓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바지 엄청 잘 어울려요. 핏도 색깔도 진짜 예쁜 바지네요.”


맞다. 오지랖.

엄청 낯 가리는 내가 이럴 땐 어디서 이런 오지랖이 발현되는 건지 참 모르겠다.

“그쵸! 예쁘죠? 이 바지! 저랑 취향이 비슷하시구나.”

“네, 진짜 잘 어울려요. 이리저리 잘 입힐 것 같아요.”

나의 말이 두 명의 일행에겐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여자의 지랄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수의 의견에 밀리고 있는 배기바지 여자의 취향에 힘을 싣고 싶었다. 마침 진심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 여자는 이제 금방이라도 결제할 기세로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내가 원피스 쪽 섹션으로 이동하자 두 일행은 아까보단 한층 더 적극적으로 그 바지를 사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을 늘어놓는 듯했다.

괜한 오지랖을 부린 이상한 여자가 된 것 같은 나는 뾰족한 카라가 앞뒤로 이어져 포인트가 되던 줄무늬 네이비 티셔츠를 골라 계산대로 갔다.

카드를 받은 점원의 눈빛에서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읽었다.

안 그래도 편이 없어 내 오지랖을 질책할 타이밍에 이르르고 있던 차에 신이 나서 말했다.

“쇼핑은 이래서 혼자 해야 한다니까요.”

“맞아요. 그래서 저도 쇼핑은 혼자 해요. 일행분들이 저렇게 말해버리시면 저희는 그게 어울려도 참 말하기 애매해진다니까요.”


그 여자는 과연 내가 그곳을 빠져나가고 난 후에도 배기바지에 대한 소신을 지켜 결제까지 이어졌을까.


어릴 적엔 내가 맘에 드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른 이들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엔 내가 정말이지 마음에 쏘옥 드는 것이라면 다른 이들도 비슷하게는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배기핏의 진청바지가 그 여자나 나에겐 주야장천 입히는 교복이 되어줄 순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미션처럼, 혹은 심지어 벌칙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Flensted 모빌을 소파 위에 걸면서 신나 하던 나를 쳐다보던 남편의 눈빛이 떠오른다.

우리 집에 있는 정말 잘한 소비라고 손에 꼽는 몇 가지 중 하나라도 과연 남편의 쇼핑리스트에 진입이나 할 수 있을까.

쓸모는 단어를 해석하는 것에서도 이미 차이가 발생한다.

나의 남편과 엄마의 쓸모는 ‘사용’을 기준에 둔다.

나와 나의 동생 성질의 쓸모는 ‘만족’을 기준에 둔다.

이렇게 다른 기준으로 시작된 쓸모는 취향이 되고 소비로 이어지며 스타일로 다져진다.


오늘 내가 입은 연두색 새틴 롱스커트는,

20000원이라는 합리적인 가격이었던 데다가

입을 때마다 뭔가 특별해지는 것 같아 나를 들뜨게 하고,

칙칙한 톤 다운된 맨투맨에 입으면 포인트가 되어주는 매우 쓸모 있는 아이템이다.  

이렇게나 많은 역할을 하는데 어떻게 이보다 더 쓸모가 있을 수가 있겠는가!!



내 남편은 이 치마를 입은 나를 볼 때마다 참으로 한결같이, 꾸준히도 고개를 내젓지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물웅덩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