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끼라 Jan 26. 2022

집안일 중에 요리가 제일 싫다

근데 설거지는 너무 재밌고요

내 친구 슬기는 요리를 참 잘한다. 신기한 게 본가에서 살 때보다도 자취를 하면서 더 많은 음식을 만들어 먹고 산다고 했다. 무슨무슨 덮밥, 무슨무슨 파스타, 무슨무슨 샌드위치, 무슨무슨 반찬과 무슨무슨 밥... 슬기가 블로그에 가끔 올리는 음식 사진들을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본가에서 사는 나보다도 훨씬 더 잘해 먹고 지내는 것 같다.


보통 자취방의 부엌은 본가의 부엌보다 공간이 좁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냉장고 역시 작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냉장고 속 요리 재료들의 가짓수 또한 확연히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얼마 전, 슬기네 집에 놀러 갔을 때 나는 요리인(人)에게 있어 부엌의 크기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슬기네 집에는 냉장고와 냉동고가 별개로 있고 그 안엔 별의별 요리 재료들이 한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더욱 놀랐던 것은 일찍이 독립한 언니를 제외하고 부모님과 나, 세 식구가 사는 우리집보다도 훨씬 더 다양한 소스류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난생처음 보는 소스도 있었다.


슬기는 내가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고 노래를 흥얼거려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나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손으로는 하던 요리를 척척 해냈다. 그날 슬기가 만들어준 오픈 샌드위치는 내가 대구의 한 브런치카페에서 먹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사실 흘리진 않음) 내 인생 샌드위치보다 훨씬 훨씬 더 맛있었다.


슬기에게 언제부터 요리를 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슬기는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스스로 찌개류 정도는 할 줄 알았다고 답했다. 맙소사. 서른인 나는 아직 한 번도 찌개를 끓여본 적이 없는데! 찌개류가 '정도는'이라고 말할 만큼 요리인에게는 쉬운 음식이란 말인가?




한 사람이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필수 집안일로는 크게 요리, 빨래, 청소가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요리가 제일 싫다. 아니, 모든 집안일을 통틀어 요리가 제일 싫다. 아니, 인간이 해야만 하는 모~든 행위 중에서 요리가 제일 싫다.


내가 요리를 싫어하는 10가지 이유 :

1. 요리하기 전 필요한 재료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2. 그 재료를 사기 위해 장을 보러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3. 요리의 레시피를 완벽히 숙지해야만 하기 때문에.

4. 심지어 그 레시피에는 재료의 양, 요리 방법, 순서, 시간 등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은 데다가

5. 같은 음식이어도 레시피도 다양해서 어떤 레시피가 제일 맛있을지 골라야 하기 때문에. (+이건 하나하나 직접 해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다.)

6. 요리를 하면 부엌이 난장판이 되기 때문에.

7. 전자레인지, 가스레인지가 무섭기 때문에.

8. 불 조절이 어렵기 때문에.

9. 요리를 하면 긴장돼서 음식을 먹기도 전에 진이 다 빠지기 때문에.

10. 들이는 시간과 노력 대비 결과물이 좋지 않았던 적이 많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도 10가지 이유가 뚝딱 써졌다. 이처럼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요리를 제일 싫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행인 건 내가 집안일 중에서 설거지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들 그렇게나 설거지를 싫어하는지 사실 이해가 잘 안 된다. 설거지가 귀찮아서 다음날이나 다다음날까지 미루는 경우도 허다하던데 정말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적당량의 주방 세제를 수세미에 덜어 거품을 낸 다음, 사용한 식기류를 뽀득뽀득 닦아내고 뜨거운 물로 거품을 싹 씻어낼 때. 그릇과 수저가 다시 깨끗했던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후련함에 마음이 상쾌해지고 기분도 맑아진다. 설거지를 다 하고 식기를 제자리에 놓은 후 마무리로 싱크대용 행주로 물기까지 닦아내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자주 설거지를 '하고 싶어서' 한다.


요리는 좋아하지만 설거지는 싫어하는 사람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다는 건 나에겐 나름의 행운인 것도 같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요리를 나 대신 누군가가 해주고, 함께 음식을 맛있게 먹은 뒤 설거지와 뒷정리만 내가 하면 되니까! 나는 비혼주의고 나중엔 혼자 살 계획이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와 살아야 한다면 요리를 좋아하고(더불어 '잘하면' 더 좋다) 설거지를 싫어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


요즘은 굳이 요리를 하지 않고도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널리고 널렸다. 배달은 말할 것도 없고 밀키트의 퀄리티도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 나 같은 요리 헤이터(?)들도 참 먹고 살기 편한 세상이라 요리를 싫어하고 잘 못한다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라면은 기가 막히게 잘 끓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언젠간 나도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차려보고 싶긴 하다. 그런 날이 과연 오긴 올는지.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체중계를 내다 버린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