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주간에 인솔 및 안전관리 근무를 서주실 선생님이 펑크가 났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코로나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교육팀 지도사 선생님들의 발에 불똥이 떨어졌다.
저녁 식사 후 마지막 프로그램이 끝날 시간이 되면 당직 근무자가 출근한다. 밤에는 학생들이 이동하는 일정이 없으므로 근무자가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반면 낮에는 여러 조로 나뉘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공연 무대를 준비하기 때문에 보조 선생님이 제법 많이 필요했다. 친구는 혹시 나에게 주간 근무를 서줄 수 있는지 부탁했고, 다행히 전날 당직 근무가 없었던 나는 하루 만에 핼쑥해진 친구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주간 근무는 생각보다 바쁘게 돌아갔다. 일정표가 있지만, 인원이 많다 보니 예상 시간보다 지연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동 과정에서 다른 길로 새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무대에서 아이들이 예정에 없던 멘트를 하거나, 음원을 잘못 보내서 지연되는 상황도 발생한다. 그렇게 1분, 5분, 10분이 밀리기 시작하고, 누적되면 저녁에는 매점 이용과 샤워, 점호 등등의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주간 근무를 경험하고 나니 당직 출근을 할 때, 교대하는 선생님들이 마치 카x오톡에 흑백 이모티콘처럼 변한 탈진 상태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조 선생님들도 평균 2만 보 이상, 지도사 선생님들은 평균 3만 보를 훌쩍 넘기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무전기와 연결된 이어폰 있기에 휴대전화를 책상에 올려두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부분은 만보기에 찍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포함해 생각하면 확실히 지도사 선생님들이 사무실에 들어가면 널어놓은 빨래처럼 의자에 늘어져 있거나, 퇴근 후 아래 편의점 앞 벤치에 모여 칼로리를 보충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주간 프로그램 보조를 하다 보면 아이들의 활동사진을 많이 찍어야 한다. 마지막 퇴소식 때,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자, 선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진과 영상들을 편집해서 강당에서 보여준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만든 영상도 아닌데 괜스레 뿌듯하다. 악마의 탈을 쓴 말썽꾸러기들도, 유독 잘 따르던 아이들도 떠오르며 ‘퇴소하면 이제 다시 남이구나.’ 생각이 들며 잠깐 뭉클한 감정이 든다.
지도사 선생님들은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므로 사진을 찍을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보조 선생님들이 꾸준히 사진을 찍어 줘야 하는데, 나는 사진을 많이 찍어보지 않아 구도라든지, 어떤 포인트를 찍으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질보다 양으로 커버하기 시작했다. 방대한 양의 사진을 전송하려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영상을 제작하는 선생님은 퇴소식 전날이면 어쩔 수 없이 야근해야 하는데 조금 죄송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뒷일은 영상을 만드는 선생님이 알아서 하실 거다. 만약 잘못이 있다면 나는 그저 맡은 바 임무인 사진을 열심히 찍은 죄(?)밖에 없으니까.
지도사 선생님들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뒤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정확히는 내가 사진에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사진도 괜찮게 잘 찍는다는 것도 알았다. 특히 잘 나온 사진들을 보면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더 많이 뿌듯하다. 이 맛에 친구들이 밥 먹을 때 음식이 나오면 휴대전화부터 들이대고, 어디 놀러 갔다 하면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걸까?
조금씩 촬영이 익숙해지니, 양보다 질로 바뀌고 전송하는 사진의 수가 줄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은 많았지만, 촬영에 재미가 붙기 시작하니 사진이 예쁘게 찍히는 날씨나, 특히 잘 나오는 장소, 담고 싶은 모습이 보이면 이제는 습관적으로 카메라부터 꺼내게 되었다. 이런 게 흔히 ‘촉이 왔다.’ 말하는 부분인가 싶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무언가를 만들거나 체험하면서 짓는 다채로운 표정들은 나까지 풋풋한 감정이 들도록 만들었다. 동심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맞을까 싶지만, 아이들과 함께 노는 지도사 선생님들의 표정이나 하는 짓이 귀여워 죽겠다는 보조 선생님들의 표정도 힘들지만 즐거워 보였다.
마치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 팔레트만 알고 있다가, 버건디나 애쉬 바이올렛과 같은 색에 처음 눈을 뜬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다채로움과 순수함에 몽글몽글함을 느끼던 무렵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 15년 전에 나를 보고 누군가도 나처럼 이런 풋풋함을 느꼈을까? 궁금했다. 지금 나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을까? 부모님 세대도 우리 또래를 보며 그런 감정을 느낄까? 그 시절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것들. 하루하루 친구들과 뛰어놀고, 모르던 세상을 알아가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다가올 미래를 설렘이 가득 차 기다릴 수 있다는 게 정말 소중한 축복이라는 것을 나는 스물여덟이 되어 첫 퇴사를 하고 나서야 알았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인생이 즐겁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막연히 내일을 기대하기에는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를 너무 많이 지나왔나?’ 하는 생각이 차올랐다.
언제부터 나는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값진 날들을 악보에 도돌이표나 타원형의 노선을 빙글빙글 쳇바퀴 돌리듯 다니는 내선순환 지하철 따위로 생각하게 됐을까? 100세 시대에 나는 아직 인생을 3분의 1도 살지 않았는데. 이 감정이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 혹은 사춘기의 감정과 같은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그런 시기를 지나온 나로서는 금방 스스로 부정을 표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의 내일도 똑같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명이 떨어지는 앞에 무대와는 다르게 가장 뒤쪽 어두운 곳에 서서 퇴소식을 바라보던 나는 아주 잠깐 등 뒤에 쌓여있는 의자들 사이에서 깊은 무언가 새어 나와 목덜미를 할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내 영상을 보며 꺄르륵 웃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와 식은땀을 닦아내야만 했다.
‘후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십 대 청년인데. 벌써 이런 감정들을 품고서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아이들이 떠드는 시끄러운 강당 속에서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내일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