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어제는 보기를 오래 미뤄둔 영화를 봤다.
영화의 마지막, 해성은 나영에게 다음 생 다른 인연으로 만나기를 기약하며 그곳을 떠난다. 그들은 다음 생 조금 더 나은 인연으로 만났을까. 1시간 반 남짓의 영화가 끝난 뒤 머릿속엔 지하철 해성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저씨의 옆모습만 남았다. 옷깃 스친 사이라는 인연이라는 단어가 아저씨와 해성의 전생을 함부로 상상하게 한다.
우리는 전생에 어떤 사이였길래 이번 생 이렇게 만나 인연을 맺을까. 나 자신과의 인연도 감히 그중 하나일까. 내 입을 통해 뱉어진 문장들을 후회하던 수많은 밤과 유난스레 아끼며 부끄럽게 나를 챙기던 이기적인 날들이 돌보지 않던 이전 생 나와의 인연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나는 언제나 안쓰러웠을 것이다.
이 아침 환기를 위해 연 창문 너머로 한 그루의 나무를 본다. 매일 아침 유난히 눈 맞춤이 길었던 저 나무가 전생의 나의 연인이었을 것이다. 요전 날 눈비 맞으며 서 있던 저 나무를 사진 찍은 일이 생각난다. 다음 생 우리가 같은 프레임 안에 있다면 그때는 내가 너보다 조금 더 키가 크길, 그것도 어렵다면 아프지 않게 내려앉은 그날 밤의 눈 결정 하나이길. 그것이면 족할 것만 같았다.
이번 생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남아 다음 생 새로운 사이로 마주할까. 이름 부르는 간단한 일이 입술부터 떨려와 가장 어려운 일이 되고 마는 당신이, 다음 생 부디 온 힘을 다해 나와 가장 먼 그곳에서 ‘지금’만을 생각하며 살길 빌었다. 하지만 이런 소원을 빌면서도 다음 생엔 너의 이름을 가득 적어야지 그때는 너를 눈동자로 아니 욕심인 줄 알면서 온전히 너의 얼굴로 기억해야지 해버린다. 이번 생의 너는 부끄러움에 자꾸만 바라보던 너의 코트 깃이나 오른쪽 어깨 위 먼지 같은 것으로만 남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지금 가장 궁금한 건 그것도 아니오 다음 생 그녀와 만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뿐이었다. 나는 다음 생의 그녀가 대체로 생각이 깊지 않아 경솔하고, 못된 쪽에 가까운 이기적인 인간이라 자주 평가받았으면 한다. 아직은 내가 부족해서, 그래도 그 생에 한 번쯤은 지하철 나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 급히 뛰어내리는 날도 찾아오길. 그 모양새가 요란해서 아주 잠시 나의 주의를 끌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와 나를 8천 겁의 인연이라 했고, 다른 말로는 부모와 자식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