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내 문장을 망친다.

결핍이 없으면 사랑도, 글도 안 되는 걸까?

by 유옥





“연애에는 결핍이 필요해. 근데 넌, 그다지 간절해 보이지도 않으니 그게 문제야.”


500cc 맥주잔을 반쯤 비운 친구가 먹태를 뜯으며 말했다. 사랑은 결국 자신 안의 결핍을 알아차리는 일이라고, 어딘가에 흘려버린 조각을 찾아 서로의 틈을 메우려 애쓰는 그 허우적거림이 연애의 기원이라고 했다.


©pinterst


요즘의 나는 연애에서 멀어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결핍에서 멀어졌다. 사람들은 흔히 ‘연애세포가 죽었다’ 고 묘사하지만, 내 경우는 감각이 무뎌진 쪽에 가깝다. 비극처럼 들리겠지만 이상하게 괜찮다.


내세울 만큼 채워진 삶은 아니어도 부족하지 않다. 적당히 안정적이고, 묘하게 평온하다.


©pinterst


요가를 하고, 저녁에는 하천 둔치를 달리면서 가끔은 아끼는 사람들과 커피 혹은 술을 마신다.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온도의 일상.

난 이상하게 그 온도가 좋다. 조심스러울 만큼 좋다.

인생의 적정 온도가 있다면, 아마 지금쯤일 것이라 감히 말해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 평온이 글을 쓰지 못하게 만든다.

결핍이 사라지자 문장이 멈췄다. 불안이 사라지고 외로움이 사라지자, 그동안 나를 쥐어짜던 언어들도 함께 사라졌다. 배부른 감정으로 쓰는 글은 늘 그렇다.


얕은데, 예쁘고, 공허하다.


“행복은 작은 일상 속에 있다” 같은 포스터 문구 수준의 미사여구만 남는다. 마치 어릴 적 휴게소 푸드코트 유리 진열장에 놓인 윤기 나는 플라스틱 음식처럼 말이다. 보기엔 근사하지만, 냄새도 맛도 없다.


그런 문장은 내게 죽은 문장이다.

요즘의 고민은 단 하나다.


©pinterst


“너무 편해서 글을 못 쓰는 걸까?”


작가라면 불행이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는 낡은 믿음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상처 없이 지나가는 하루를 보내면 손끝이 멍해진다. 아무 말도 적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글을 쓰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영감용 인간관계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누군가와 미친 듯이 사랑하고 싸우고, 비를 맞으며 울고 싶어진다.


“나 아직 당신을 사랑하니까 가지 말아요.”

그 유치한 대사를, 단 한 번이라도 다시 진심으로 외쳐보고 싶다.


그 3류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시절의 나는 그렇게라도 살아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저 평온하게 살아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문장은 늘 그 둘의 경계에서만 태어난다.

이따금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의 평온은 회복일까,

회피일까. 모르겠다.


다만 지금의 나는 어찌되었든 간에 행복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작가로서는 약간의 불행이지만, 한 사람으로서는 꽤 괜찮은 일이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다.


불안하지 않은데 불안하고, 충분한데 허전하다. 하루 세 끼를 챙겨 먹고, 음악을 듣고, 요가를 하면 아무 문제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서 아주 작은 떨림이 나를 불러낸다.


불편하거나 서툴어서.

너무 외로워서 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던 시절의 나.


그때의 나는 참 불안했다. 모든 문장이 생존의 몸짓이었고, 한 문장 한 문장이 심장의 박동이었다. 미숙했지만 살아 있었다. 지금의 문장은 단정하다. 단정한 문장은 아름답지만 때로는 생명력이 없다. 너무 다듬어진 돌처럼 반짝이지만 따뜻하지 않다.


결국 나는 다시 결핍을 배워야 할 것이다. 사랑이든 글이든, 약간의 모자람이 있어야 살아 움직이니까. 결핍은 나를 쓰게 하고,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니까.


©pinterst


그래서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그 결핍의 미세한 입자를 더듬는다. 그것은 불행의 잔재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사랑이 떠난 자리, 글이 멈춘 자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고요한 틈새에서 나는 다시 나를 꺼내 쓴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이 고요 속에서도 문장은 자란다.


나는 느리게, 불안과 평온의 경계를 걸으며 쓴다. 결핍이 아닌 충만으로부터도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 수 있기를 바라며.


그게 지금의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이다.




글, 편집 | 유옥(瑜)​
@0k.Y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