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Gaga- Blade Of Grass 와 ‘72시간 소개팅’
그는 내 글을 읽는 사람이다.
그저 읽고 지나가지 않고, 손으로 옮겨 적는다.
문장을 한 줄씩 따라 쓰는 동안 의미를 앞서 해석하지 않고, 먼저 호흡을 받아들이는 사람. 필사라는 느린 방식을 통해 글을 자기 안으로 들이는 태도가 있다.
누군가가 내 문장을 그렇게 대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기쁘다기보다는, 조심히 다뤄지고 있다는 느낌에 낯설어서. 내 생각과 문장이 허투루 소비되지 않고, 머물 자리를 얻는 순간의 감각. 그것은 인정이라기보다 신뢰에 가까웠다.
그의 손끝을 거쳐 다시 태어난 문장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생각보다 단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가볍게 흘려보내기엔 조금 무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 대충 대하면 어긋나버릴 결을 가진 존재라는 확신.
사랑은 어쩌면 타인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의 무게를 아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사랑받으며, 나를 함부로 다루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는 묻지 않는다. 왜 이런 문장을 썼는지, 왜 이 단어를 고집했는지. 대신 묵묵히 따라 적는다. 잔디 위를 함부로 밟지 않고 지나가듯, 문장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오래 바라보는 태도.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사랑은 거창한 약속보다 이런 조용한 동작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예전의 사랑들을 떠올린다.
시간은 충분했지만 마음은 늘 어딘가 비어 있었다.
오래 함께했음에도 서로의 중심을 비껴가던 순간들. 계절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마음은 제자리에 머물렀다.
한때는 믿었다.
사랑은 시간이 완성하는 것이라고. 오래 버티면 언젠가는 깊어진다고.
하지만 요즘의 나는 다른 감각 속에 있다.
사랑은 시간이 아니라 밀도에서 태어난다는 말이, 이제야 몸으로 와 닿는다.
얼마나 오래 함께했느냐보다, 얼마나 자주 서로의 안쪽에 닿았는지가 남는다. 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흘려보낸 관계와, 단 하루라도 서로의 속도를 정확히 맞춰본 관계는 분명 다르다.
우연히, 72시간 동안 여행지에 함께 머물며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을 보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가능할까, 너무 극적인 설정은 아닐까.
그런데 프로그램 속 출연자들을 보다 문득 마음이 조용해졌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한 번쯤은 찾아오는 게 아닐까.
설명보다 먼저, 아, 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이 도착하는 순간.
사랑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사람에게 온다.
나는 지금, 그런 상태로 그의 곁에 서 있다.
그는 내 전부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가진 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예민함도, 불안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까지. 그 앞에서 나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충분하다는 감각이 나를 조용히 붙잡는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오래 이어지는 사랑도 있고, 짧지만 깊게 스며드는 사랑도 있다. 긴 연애가 반드시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오래 본다고 해서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나는 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서사와 속도가 있다. 내가 사랑이라 느끼는 순간이 사랑이고, 내가 진짜라고 믿는 감각이 진짜다.
확신이 생겼다면, 의심하지 말 것.
착각인가 싶을 만큼 심장이 먼저 요동치고, 사소한 접촉 뒤에 한동안 귀 안쪽이 멍해지는 순간을 부정하지 말 것.
인생에는 한 번쯤, 지나치게 정직해서 오히려 믿기 어려운 장면이 찾아온다.
그런 사랑 앞에서 너무 빨리 계산하지 말고,
마음이 허락하는 만큼 충분히 머물 것.
나는 지금, 잔디 위에 서 있는 기분으로 사랑을 바라본다.
화려하지 않지만 살아 있고, 쉽게 꺾이지 않지만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되는 것.
그가 내 글을 대하는 방식으로,
나는 이 사랑을 대하고 있다.
글, 편집 | ©유옥(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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