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나날들을 위하여

by 유원



나는 약간 발작적으로 걷는다. 무슨 말이냐면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갑자기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간다. 걸을 곳은 정해져 있지만 목적지는 없다. 그냥 걸을 뿐이다. 좀처럼 행동력이라고는 없는 내가 가장 충동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물론 걷기 시작하는 이유는 있다. 너무 생각이 많거나, 혹은 무기력해서. 더욱 깊은 우울감에 빠지기 직전에 나를 건져내서 밖으로 떠민다. 물론 걷는다고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생각들이 멈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집에 있을 땐 차곡차곡 쌓여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던 생각들이 걷다 보면 하나씩 하나씩 어딘가로 흘러가는 기분이다. 아니면 보폭에 맞추어 제자리를 찾거나.


그러나 모든 날의 걷기가 항상 효용을 갖추는 건 아니다. 가끔은 부작용도 있어서, 너무 많은 생각에 감추어져 있던 나 자신을 불현듯 마주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거대한 공허와 마주하는 기분이다. 일상의 크고 작은 고민들로 덕지덕지 가려두었던 커다란 구멍을.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인지 청승맞게 눈물이 비져나오려는 걸 참는다. 다른 이의 눈물에는 관대하지만 내 눈물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느껴지지만... 이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눈물이니까. 이 공허와는 죽을 때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비관한들 나의 나날들은 멈춤 없이 나아간다.


근래 읽은 책에서 본 필립 라킨의 ‘나날들’이라는 시.

‘나날들이 아니라면 우리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아, 그 문제를 풀자면 사제와 의사를 불러들이게 되지/ 긴 코트를 입은 채로/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그들을.‘

저자는 이 구절에서의 사제와 의사를 각각 종교와 과학으로 해석한다. 우리의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종교에의 믿음이나 발달된 의학의 힘이 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그들을 묘사하는 문장은 어딘지 냉소적이다. 시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주어진 나날들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달리 대안은 없다는 거다. 종교도 의학도 우리의 속절없는 시간의 흐름을 어찌하지 못한다.


무엇이 나의 공허를 채워줄 수 있을까? 나는 앞선 시인의 말투를 빌려 회의적으로 대답한다. 없다고. 시간들은 대체로 무의미하게 흘러간다. 내가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거나 다른 시간대에 있다고 무언가가 달라질까. 그때의 나도 별 수 없는 나날들을 살 텐데.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이 나날들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은 영원하지 않고 유한하고 달리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 나는 언제나 이곳에 있다. 나의 오랜 친구인 공허와 함께. 살면서 아주 많이 공허함을 맞닥뜨릴 테고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 울겠지만. 그럼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작은 나날들을 위한 가장 작고도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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