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리

by 유원


길었던 학교 과제를 끝내고 과제에 필요했던 도서관 책을 반납하러 다녀왔다.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어두었다. 늙은 개가 아파트 복도로 뒤뚱뒤뚱 걸어 나가고, 뒤이어 그보단 젊은 고양이가 소리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녀석들을 감시할 겸 슬리퍼를 벗지 않은 채로 현관에 주저앉았다. 어디선가 초여름 바람이 슬슬 불어왔다. 고양이는 현관 앞 복도에서 햇빛을 쬐며 잔뜩 뒹굴거렸다.


올해 들어 계획 강박이 생긴 것 같다. 작년 말 즈음부터 지금까지 빼놓지 않고 주간 계획을 짠다. 월별로 뭘 해야 할지도 쭉 적어 두었다. 졸업논문 통과해서 졸업하기 같은 대사건도 있고, 미용실 가서 펌 하기 같은 소소한 할 일도 있다. 주간 계획도 살펴보면 그리 대단치 않은 일들이다. 누구 만나기, 책반납하기, 산책하기, 과제 제출하기 등등. 하다못해 망고 요거트 만들기도 적혀 있다. 이런 것까지 적어두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 마음은 어디서 발현한 걸까.


그건 어쩌면 뭘 해도 불안하다는 마음,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자각일지도 모른다. 졸업은 다가오는데 별로 해 놓은 것도 없고, 1인분만큼의 오롯한 본분을 해내기에 아직도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 이 나이를 먹고도, 하고 되뇌게 된다. 누군가에겐 한없이 젊은 나이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어리다고 할 수만은 없는 나이.

수없는 내 계획의 흔적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은 공허한 하루하루에 어떻게든 원동력을 불어넣기 위해 발버둥 했다는 증명일지도 모른다. 이렇게라도 나 움직이고 있다고.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고.


오늘은 과제도 끝났고 알바도 없는 날이다. 무언갈 해야 한다는 오랜 강박에서 스스로를 조금 내려놓아 도 되는. 조바심을 내며 여기까지 왔지만 뭔가 진전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래봤자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임무들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나, 하는 회의.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은 여전히 미래에 차근차근 쌓여 있다.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샌드위치 재료처럼 껴서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는 나.


우리 집은 현관을 열면 바로 부엌을 겸한 통로가 나오는 구조이다. 부엌의 맞은편, 현관 왼쪽에는 내 방문이 있다. 그 통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내 방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열어둔 현관문 밖에서 고양이는 뒹굴거리며 나를 보고 있고. 개는 복도 끝에서 서성댄다. 거실도 아니고 부엌도 아닌, 그렇다고 현관도 아닌 이런 애매모호한 자리에 앉아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하면서도 옅게 슬프다. 나는 왜 늘 이도저도 아닌 것에 마음을 두나. 봄도 여름도 아닌 이 계절을 사랑하듯이. 고여있고 싶지 않아 움직이지만 멀리 나아가지 못하는 내 처지에 머무르듯이.


어쩌면 이게 나의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음이 녹아 맹숭맹숭해진 라떼를 마시며 현관문을 닫았다. 개와 고양이가 집 안의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동안, 잠깐은 현관에 서 있다가, 이내 나도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의 할 일을 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나의 자리를 가늠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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