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과 기원

by 유원




모르겠습니다, 무슨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오늘처럼 마음이 어수선한 날에는 모든 게 희미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동안 믿어왔던 것들이 이제와 물거품이 되는 걸 망연히 지켜보는 것처럼요. 나는 의미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종내에는 최초의 목적조차 망각하는 종류의 사람입니다. 애초에 모든 것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기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계기도 그리 대단치 않습니다. 그냥 동네에 있는 다이소에서 물건을 고르다가 퍼뜩 생각이 났을 뿐이에요. 이 매장이 없었을 때는 다이소에 가려면 한참은 걸어가야 했는데. 그때 나는 떠 올린 겁니다. 이곳에 다이소가 없었던 시절을요. 한참은 더 걸어서 다른 다이소에 가야만 했던 그때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때 이곳엔 뭐가 있었지? 나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건을 고르거나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어요. 이 모든 건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어요. 마치 그곳에 아무런 역사도, 기원도 없는 것처럼.


나는 기원에 대해 생각했어요.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을 테니까요. 모든 사건도 어떤 시발점으로부터 출발하니까요. 사람도 태어나야 존재하니까요. 기원에 대한 생각이 내게는 필요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의미는 없지만, 적어도 역사는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가 밟아온 궤적은 어쩌면 의미를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 의미보다 더 많은 걸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말한다는 표현은 어울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미는 말을 하지만, 기원은 말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을 하니까요. 그저 보여줄 뿐이니까요.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기원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다이소에서 물건을 고르다가, 괜스레 옆에 선 애인의 등짝을 바라봤어요. 이 관계에도 기원이 있다면 그건 언제지, 생각하면서요. 기원으로부터 우리는 자꾸만 멀어지는 중이었어요. 시간의 관점에서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기원의 관점에서 우리는 시작에서 멀어지는 중이었습니다. 이 관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우리가 무언가를 잊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이었습니다.


태초에 한 점이 있었고, 그 점이 폭발하면서 우주가 탄생했습니다. 기원은 그런 것일지도 몰라요. 강렬하고도 폭발적인 하나의 사건. 아주 고요한 사건이었을지라도, 기원의 파급력은 하나의 우주가 생겨나는 것과 맞먹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원은 쉽게 잊혀요. 그리고 우리는 기원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가 순간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순간은 흐르고 있으니까요. 미래는 몇 초 단위로 눈앞에서 들이닥치는 중이니까요.


오늘같이 마음이 어수선할 때는 다른 건 전부 제쳐두고 기원부터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책상에 나뒹구는 꾸깃한 지폐의 기원을 생각하고, 책상 밑에 누운 고양이의 기원을 생각하고, 창 밖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의 기원을 생각하고, 나 자신이라는 우주의 기원을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 모든 게 생겨났다는 것, 그리고 나름의 이야기를 축적하며 여기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대견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면 당연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걸 잊지 않는 감각이 중요한 게 아닐까요. 매 순간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니까요. 모든 것에 의미는 없지만 기원은 있다. 그 사실을 곱씹으며 살다 보면 어느새 이 찰나의 순간도 기원으로 축적될 겁니다.


하지만 단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원은 살아가는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저 살아간다는 게 도통 뭔지 모르겠다 싶은 날에 한 번씩 떠올리면 족할 지도 몰라요. 이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쥐어 주었든 간에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요.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감각. 소중한 것을 알고 있다는 감각. 모두에게 기원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는 느낌. 나는 새로 생긴 다이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점포가 생기는 날에도 다이소의 기원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럼 내 기억 속에서 다이소는 조금 더 완전해질지도 몰라요. 마음이 어수선하면, 나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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