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다녀온 뒤, 한동안 나는 번아웃에 시달렸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반기 내내 야근과 시험준비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데다가 꽤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은 탓에 기본체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유달리 더웠던 올해 여름 날씨, 특히나 DC에서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던 살인적인 더위의 영향도 번아웃을 부르는데 한몫 했다. 무엇보다 완전히 새로운 업무에 배치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했기에, 하루 종일 온 몸에 힘을 주고 일을 하다가 집에 오면 뻗고, 주말엔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침대에 누워 앓기만 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환경에 부딪히는 것은 늘 어렵고 도전적인 과제이다. 더구나 나는 내 주변의 동료들만큼 머리가 좋다거나 두뇌회전이 잘된다거나 순발력,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보니, 늘 새로운 업무를 익힐 때 초반 6개월은 꽤나 고생을 하면서 배우는 것 같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 4번째 팀 배치인데, 앞의 세번의 적응기간에 하나같이 힘들게 적응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예외없이 하드랜딩 중이다.
해내야 할 인생의 과제들이 아직 산재되어 있음에도, 회사에 다녀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은 몸대로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아 힘들었고, 새로운 업무를 따라잡으려면 좀 더 많은 시간 투입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업무시간 외에 더 시간을 투입할 기력이 도무지 남아있지 않았다. 회사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지금 현재 내 앞에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해내는 것은 나의 다음을 위해서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자꾸만 따라가지 못하고 실수하고, 좀 더 빨리 해내지 못하는 내 자신을 나는 어느덧 스스로 비난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다보니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이 한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몇번 혼자서 운동하는 것을 시도해보았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체력 앞에서 자꾸만 무너졌다. 의지를 내는 것 자체가 힘에 부쳤다. 그래서 정말이지 큰 마음을 먹고 집 근처 PT를 등록했다. 회사 동료들을 따라 시작한 테니스도 내 경제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얼마 가지 못하고 그만뒀는데, 개인 PT라니... 정말 내가 여태까지 부려본 사치 중 끝판왕이라고 해도 좋을것 같다. 하지만, 체력을 회복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내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과감히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없을 때에는 계속 혼자 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릴게 아니라 남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8월 중순, 처음 PT를 등록하고 벌써 10번의 수업을 받았다. 처음에는 변화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데 7회쯤 되면서 주말에 몸이 아픈 현상이 조금씩 사라졌고, 퇴근 후 돌아와서 밥을 해먹고 다음날 가져갈 도시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줄고, 따라잡지 못한 회사 업무를 익히기 위해 퇴근 후 나머지 공부를 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출근 시간에 맞춰 겨우 도착하던 패턴에서 벗어나 조금씩 여유있는 출근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무겁기만 했던 몸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몸무게는 여전히 철옹성 같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소위 눈바디라고 하는 몸선이 서서히 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옷태가 망가져서 출근할 때마다 옷을 고르며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아직 갈길이 멀지만 조금씩 예전의 몸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보통 주 2회 PT를 받고 있는데, 살이 빠지려면 이 외에 주 2회 개인운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처음엔 주2회 PT를 가는 것만 겨우 했는데, 2주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번 혹은 두번 정도 개인 운동도 병행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 주2회 PT를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내가 10회에 44만원이라는 거금을 냈다는 사실이었다. PT를 하는 날이 돌아올 때마다 체육관에 가는게 너무 힘에 부쳤었는데, 가기 싫은 마음이 들다가도 돈이 너무 아까워서 무거운 다리를 끌고 체육관 출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PT를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에게 맞는 운동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PT를 받기 전까지, PT는 돈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요즘은 운동 방법이 유튜브나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도 다 나오는 데다, 바디프로필 같은것을 찍을 생각도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한번쯤은 PT를 통해서 제대로 운동 방법을 배워보는 시간은 꼭 필요한 것 같다. 적어도 몇단계 업그레이드 된 방법으로 운동을 할 수 있기에, PT를 받는데 드는 비용이 다소 들긴 하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다. 아무 운동이나 되는대로 따라하는 것과, 내 특성을 잘 파악하여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고효율 운동을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나는 PT를 받으면서 그동안 내가 헬스장에서 했던 운동은 운동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까지 했다.
체력이 향상되는 것 외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는 것도 PT의 긍정적인 효과다. 개인 트레이닝을 받는 동안 나의 운동능력 외에도 습관이나 성향도 조금씩 드러날 수 밖에 없는것 같다. 10회의 PT를 거치면서 선생님은 나에 대하여 "새로운 운동 자세에 대한 습득속도, 운동지능은 남들보다 떨어지는 편인데 대신 일단 자세를 익히면 그다음부터 자연스럽게 자세가 잘 나오기 때문에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라는 분석결과를 내놓았다. 또한, 근성과 승부욕이 엄청 강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처음에는 남들보다 훨씬 느리지만, 근성과 승부욕으로 버티면서 나중에서야 조금씩 성과를 내는건, 비단 운동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공부와 일에서도 나는 늘 이런 식이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학부 시절 처음 영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너는 네 동기 XX만큼 뛰어난 학생이 아니다."라는 독설을 들을만큼, 성장이 더뎠다. 동기들이 모두 적어도 6개월 이상씩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동안,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살다온 친구들이나 어학능력이 나보다 뛰어난 학생이 많은 상태에서, 안그래도 느린데다 남들만큼 시간 투입을 못하니 나는 참 더디게 성장했다. 하지만 3학년 중반 이후에는 거의 대부분의 과목에서 A 이상을 받았고, "영어실습"이라는, 당시 영문과 학생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수업으로 꼽히는 클래스에서, 어학연수를 다녀온 동기들을 제치고 3등 안에 들어야만 받을 수 있는 A+를 받을 수 있었다.
복수전공으로 경영학, 그 중에서도 회계학을 시작했을 땐 더더욱 느렸다. 고급회계 수업에서는 중간고사 성적이 너무 바닥에 있어서 교수님 면담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이해가 빨리 되지 않으니, 내 스스로도 답답하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을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계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을 무렵에는 회계학 수업에서 가장 빨리 문제를 풀어내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전공 관련 시험에서 1차시험을 통과하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후 나는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법학에서도 나의 슬로우 스타터로서의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법학에서는 앞서 공부했던 것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음에도 시간을 많이 투입하지 못했고, 또한 내 멘탈도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나는 법학이라는 섹터에 들어오면서 학교 안팎에서 모두 인생의 쓴맛이라는 쓴맛은 있는대로 다 맛보았다. 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이루지 못한 채 회사에 들어왔다. 회사에 들어와서도 심기일전하여 노력해 보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여기서 그만둘까, 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기서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다면 끝까지 길을 개척해보자는 생각으로 미국변호사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아직 진행중이다.
요즘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남들처럼 빨리 습득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정말 미웠다. 자신감도 떨어지고, 아침에 회사에 가는게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출근이 아니라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했다. 왜 자꾸 사소한 실수를 하고, 한번에 이해하지 못할까, 너무 괴로웠다. 이런 상황 속에서, 트레이너 선생님이 나를 분석한 결과를 들으니, 이상하게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들으니, 그냥 내 자신을 어느 정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 다음날부터 나는 실수리스트와 체크리스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실수를 자주하는 영역과, 일을 하면서 꼭 체크해야 하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유치하지만 이렇게 하나 하나 체크하다보니, 실수가 줄어들었다. 또한, 일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나머지 공부를 시작했다. 분명한 사실은, 나는 내 동료들만큼 머리가 좋지도 않고, 그들처럼 좋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며, 게다가 같은 직급의 다른 동료들보다 나이까지 많은 편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건, 시간을 좀 더 투입하는 것밖에는 없다. 심지어 내 동료들도 열심히 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인정하고,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를 정하고 나니 그 다음은 오히려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인생 처음으로 PT를 받게 되면서, 나는 내 자신을 알아가고, 체력과 자신감도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8월 중순, 처음 다시 운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러닝머신에서 30분을 다 채우지 못했다. 9월이 끝나가는 지금은 45분 동안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되었다. PT 가는 날 마다 다 때려치우고 안하고 싶었지만, 지고 싶지 않아서 버텼다.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인생의 다른 영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지는게 너무 싫다. 패자로서 살아가는 인생은 너무 불편하고 재미가 없다. 이미 나는 인생에서 수없이 졌다. 질만큼 져봤으니 이제는 좀 이겨보고 싶다. 버텨내고 또 버텨내서, 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내 자신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