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렇다
대학 신입생 첫학기, 나는 영어회화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물론 영어를 공부하는 것 자체를 좋아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당시 담당 교수님이 20년 가까이 학교를 다니면서 손에 꼽힐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다가 한국에 들어와 우리 학교에서 수업도 하고, 책을 내기도 했던 그는 매 수업 때마다 랄프로렌 셔츠와 몸에 딱 떨어지는 정장, 그리고 멋있는 옷차림에 딱 맞아떨어지는 신발을 신고 등장했다. 패션을, 특히나 남자 옷은 하나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던 내 눈에도 그는 늘 완벽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2학점짜리 교양 과목인만큼 그저 이야기만 1시간 내내 떠들다 가게 할수 있었는데도, 그는 영어를 말할 때 왜 한국어와 다르게 말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매번 깊이 생각하고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하면서 "영어회화"가 단순히 말하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문화와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함께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처음으로 나를 인정해주었던 고마운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했던 말 중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돈에 지배되지 않으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돼."
그는 뉴욕에서 자수성가한 아버지를 통해, 돈을 충분히 많이 벌어야 비로소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일찍 깨달았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는 돈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무지했지만, 어린시절부터 가난과 돈 걱정에 익숙했던 그 당시의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참 맞는 말이라며 마음 속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또 끄덕였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나는 아직 자유를 얻지 못했다. 여전히 돈에 구속을 받고,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도 하고, 하고 싶은 수많은 일들을 포기하기도 하고, 내게 주어진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하루에도 몇번씩 고뇌하고 씨름한다. 물론,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오로지 돈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해야 하고, 그래서 나에게 한정된 시간이라는 자원을 하고 싶은 일들에 더 많이 할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돈이 매 순간 나의 결정적인 선택들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나는 아직도 돈에 구속을 받고 있다.
정보를 얻는 것이 무척이나 쉬워진 요즘 시대에는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와 같은 말을 믿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끔 마주치곤 한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 정말 바닥을 쳐본 적이 없거나 아니면 애써 자신을 속이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도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돈에 구애를 받아 본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돈에 구애를 받아본 적이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어떤 사람들은 돈 자랑, 돈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된 힙합 가사들을 비난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런 식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야망을 인정하는 것에 오히려 더 깊은 공감을 느낀다.
나는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99%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아직 경제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나와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대부분의 문제들이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면서 이런 생각에 한층 더 확신이 생긴다. 돈 때문에 하고싶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환경에 처한 사람에게는 돈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 돈이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바꿔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들에서 돈 문제로 길을 잃고 수년간 방황했었다(물론 내가 좀 더 현명했더라면 그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나갈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예전에 누군가가 일정한 정도 이상의 부를 쌓지 않으면 인생에서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허들을 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정말이지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돈으로 안되는 일을 찾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십년전, 나는 사람의 마음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었다. 무엇보다 어떤 사람의 마음을 돈으로 매수하는 것에 생각보다 그리 큰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허탈했었다. 어쩌면 내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너무 과대평가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의 마음만큼은 절대 돈으로 살 수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찾는 것이 더 힘들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 꽤나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 가난하다는 것은, 곧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말해서, 돈이 없다는 것은 인간답게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10년 전, 나는 사랑하는 가족이 아플 때, 돈 때문에 마음껏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 묻고 지낼 뿐, 내 마음 속에는 아직도 그때의 좌절감이 자리잡고 있다. 내 나이 서른이었다. 나는 그 때, 살면서 다시는 돈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때의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자식 노릇을 할 수 없었다(지금도 사실 나는 그리 훌륭한 자식은 못된다). 꼭 효도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돈이 없으면, 나의 배우자, 자식, 부모가 고생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돈 때문에 극한의 상황으로 가는 일은 살면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요즘 "The Psychology of Money(돈의 심리학)"라는 책을 읽고 있다. 아직 2장까지밖에 못읽었는데, 인상깊은 대목이 있었다. 바로, "돈"을 대하는 태도나 관점이 각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위에 구구절절 써놓은 돈에 대한 필요성은 내 경험에서 비롯된 편견(bias)이 많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0년 전의 비극적인 경험은 돈이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수 있는지 뼛속깊이 새기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돈을 갈망한다. 어쩐지 우리는 "돈"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을 천박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지금 이순간에도 대다수의 우리들은 돈 때문에 참아내기 어려운 것들을 참아내며 보이지 않는 밧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돈 때문에 하고싶은 것들을 모두 할 수 없을것만 같은 제약을 느낀 어느날, 돈에 대한 갈망을 글로 풀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