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될 것 같은 일이라도 될것처럼 끝까지
인사이동이 있기 며칠전부터 일도, 공부도 잡히지 않았다. 조금 그러다 나아지겠지, 했는데 인사발령이 뜨고 나서도 마음이 불안하고 극도로 예민해진 것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아서 신경안정제를 조금이라도 먹는게 좋을것 같아 병원에 갔다. 휴일이라 진료를 하는 정신과가 없어서 다른 과 병원을 몇군데 돌았는데, 전부 입구컷을 당해버렸다. 아무래도 약물을 남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미리부터 그러는것 같다. 이런 경우에 일주일치 정도 보통 처방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고, 과거에도 내과에서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일주일 정도 복용한 적이 있었는데, 더 설명할 새도 없이 간호사분들의 단호함에 떠밀려 집에 와버렸다.
다급한 마음에 최근에 응급실에 갔을때 의사가 처방해준 공황장애 약을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버렸나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약물에 절대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극복하겠다면서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들은 손도 대지 않고 모두 버렸었다. 과거의 나는 대체 왜 그랬을까.
살면서 극도의 쇼크상태를 경험한 것이 지난 10년간 세번정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잠깐씩 신경안정제를 며칠 먹은게 내 정신과 약 복용 전력(?)의 전부다. 지금도 그때처럼 쇼크상태가 가라앉지 않아서 신경안정제의 도움이 좀 필요한데 병원 여러군데서 약쟁이(?) 취급을 받으며 문전박대를 당하고 오니 모든 전의를 상실한 느낌이다. 집에서 40분정도 거리에 있는 정신과 병원은 진료중이지만 예약환자만 받는다고 한다. 살면서 감기약 만큼이나 정신과 약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은데, 유독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정신과나 정신과 약에 대한 문턱을 넘는게 참 어려운 느낌이다. 물론 정신과를 악용하고 남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미연에 방지하는 취지는 너무나도 잘 이해하지만.
회사에 들어와서 네번째 자리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사실 올해말까지는 지금의 팀에 남고 싶은 마음이 컸던터라 처음 인사발령부를 보았을땐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었었다. 하지만 내 아쉬운 마음과는 상관없이 발령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서운한 마음은 빨리 접어두고, 앞으로 갈길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수인계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 하고, 앞으로 어떻게 적응해나갈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실상 내 마음은 그렇게 빠른 적응이 되기는 어려웠나보다.
지난주 내내 정말 힘들었다. 문의가 유독 많기도 했고, 부산에 당일치기 출장을 다녀오고, 또 출장을 다녀왔더니 팀에 안좋은 일이 생겨 분위기가 살얼음판이 되어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굳이 출장을 갔어야 했냐는 얘기를 듣고 이틀동안 근로의욕이 급격히 저하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인사발령 전날 저녁 회식이 있었고, 끝내지 못한 일들과 아직 한참 밀려있는 공부 그리고 인사 발령에 대한 걱정으로 인사발령 당일엔 잠을 거의 못자고 밤을 새버렸다. 발령이 나고도, 팀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되어서 떠나면서도 마음 한켠 찝찝함을 버릴 수가 없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제일 싫고 두렵다. 살면서 "변화"는 수없이 겪어야만 하는 통과의례이지만, 그 변화의 단계 단계마다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사실 이번 변화는 그동안 후선부서에서만 근무하다가 처음으로 사업부서로 옮겨가는 것인터라 회사에 들어와서 가장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입사 후 참 오랫동안 나는 회사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었다. 그렇게 된 데엔 내 탓도 있었고, 환경 탓도 있었다. 서강대교에서 엉엉 울며 퇴근하는 날도 꽤 많았다. 내가 조직에 이렇게도 융화되기 어려운 사람인가 하는 고민도 참 많이 했었다. 그래도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내 작은 기여도 인정해주시는 분들을 만났고, 내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크게 봐주는 팀에서 일하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회사에 조금씩 정을 붙이고 또 일에만 즐겁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조금씩 늘어났다. 이번 팀에서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0 에서부터 새로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변화가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또한, 회사에 있는 동안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변화보다는 통제할 수 없는 변화가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다음 단계에 빨리 진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생각처럼 잘 따라주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벌이고, 그 일들이 제각각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때, 공황장애나 불안장애가 더 극대화되었던것 같다. 10년전의 나도 딱 그런 상황이었다. 중간고사 기간을 일주일 앞두고 할머니가 점점 안좋아지셨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엄마와 할머니의 건강 문제, 남자친구와의 문제, 학업과 내 미래, 그리고 가족의 생계... 너무 한번에 많은 것을 책임지려다보니 서서히 몸도 마음도 병들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좋은 상황이지만, 시험, 인사이동, 결혼, 그리고 돈에 대해 한꺼번에 고민이 많은 시기이다보니 마음에 무리가 좀 많았던것 같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사람들의 반응 하나하나에 자꾸 신경을 쓰다보니 자꾸 마음이 힘들었다. 쉴새없이 가동되는 내 레이더, 더듬이가 너무도 싫은데 원래 태생부터 그렇게 생긴 터라 그 레이더를 끄는게 쉽지가 않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 좀더 이기적으로 내 자신을 위해야 하는 시기라고 아무리 내 자신에게 타일러도, 나는 자꾸만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안될 것 같은 일이라도 될것처럼 끝까지 해내야만 한다. 더이상은 좌절에 휘둘려 멈추고 주저앉는 과거를 반복할 수는 없다. 안될 것 같아도 애초부터 당연히 될수밖에 없는 일이라는듯이 끝까지,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