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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래미 빵티셸 Jun 12. 2024

#16 때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마음이 있다.

뒤늦게 깨닫는 아빠 마음


남아선호사상이 짙게 남아있던 세대라,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오빠만 찾는 게 서운했었다.


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난데, 언제나 찾는 건 다들 오빠뿐이었으니 나는 뭐 하러 낳았데? 라며 속으로 빈정거릴 때도 많았다.


엄마가 나가고 나서, 고모들은 오빠를 더 많이 찾았다. 아마 방황하는 오빠이야기를 들은 고모들이 마음을 써준 거겠지만.. 난 언제나 2순위였을 뿐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 인생이 그저 누군가의 들러리의 삶이란 생각이 강했던 거 같다.


잘하는 아이는 잘하는 게 기본이라, 그게 억울하면서도 엇나가는 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오빠의 방황과 반항을 잠재우기 위해 하던 아빠의 노력조차 특혜로 보였다. 자퇴한다는 오빠를 어르고 달래 사주었던 컬러폰(그 시대에 처음 나왔던 컬러 폰이었다)을 보며 집에 와서 숨죽여 엉엉 울었다.


지나치게 철이 빨리 들어 보이던 ‘나’지만, 사실 어린아이의 모습을 꽁꽁 숨겨놨을 뿐이었다.


아니.. 사실은 누구보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으나 받아주는 이가 없어 어리광을 부리지 못했다.


그러다 평탄했던 내 인생에 첫 고비가 왔다. 수능을 말아먹은 것이다. 평소 실력보다 점수가 너무 낮게나와 멘탈이 나가있었다.


솔직히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평균 점수보다 못 미치는 성적표를 들고 오자. 아빠는 재수를 권했다.


그날이 아마 처음으로 아빠에게 큰소리 낸 날이었을 것이다.


“누구 하나 챙겨주는 사람도 없는데 뭐 하러 재수를 해요. 아빠가 나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재수를 쉽게 말하나 본데, 나는 다시 못해요. 그렇게 공부해서 되고 싶은 것도 없고요.”


그러면서 엉엉 울자 아빠는 당황했다. 늘 어른스러웠던 아이가, 착하고 시키는 일은 다 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화를 내며 하는 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엔 아빠가 나를 그저 오빠와 1+1 정도의 자식으로 생각한다고 여겼었다. 어쩔 수 없이 딸려온.. 사은품 같은 아이.


결국엔 재수하지 않고, 성적에 맞춰 전문대로 진학했다. 그 과정에서도 아빠는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학교로만 지원하라는 말만 했을 뿐 더 이상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게도, 그래서 대학 원서 가 나 다 군 모두 쓰지 않았다.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학교가 없었으므로..


전문대도 서울에 있는 곳은 갈 수 있는 곳도 쓰지 않았다. 무조건 집에서 갈 수 있는 곳. 전공도 그냥 막 썼다. 꿈이 없었기에..


다행히 들어간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고, 그것 조차도 아빠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아빠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에 그저 의무감만 있을 것이라 추측했기에 더 그렇게 강박적으로 굴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에서 아빠 친구분을 우연히 마주쳤다.


인사를 건네자 아저씨는 웃으며


“ㅇㅇ이가 학교 생활도 잘하고 장학금 받고 다닌다며? 요즘 아빠가 만나면 니 칭찬만 하루종일 한다 “


그 말에 깨달았다.


‘아.. 아빠가 나한테 표현은 안 해도 나도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냥 어쩔 수 없어서 키운 게 아니구나..‘


그걸 그때 깨달은 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꼭 말로 표현해야만 사랑이 아닌데.. 바보 같게도 그때 눈이 트였던 것이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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