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좋아하는 지루한 남자

답 없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집어 든다.

by 스눕피

평론가 김현의 <행복한 책 읽기> 속 문장 하나.


나의 문학,행위는 답이 아니라, 물음이,다.

속,없는 질문이,며 덧없는, 의,문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문득문득 찾아온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겨 먹었는지,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인지 궁금해 까무러칠 것 같은 순간 말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문학책을 집어 들었다(마치 책 속에 로또 1등 당첨 번호가 잔뜩 적혀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뒤집고). 하지만 문학은 내게 단 한 번도 명쾌한 인생사 해답이나 정답을 내려준 적이 없었다. 다만 문학은 늘 나의 생각을 한 층 더 틔어 확장시키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시끄러운 힙합 음악을 즐겨 듣고, 친구들과 만나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고, 가족들과 하나 마나 한 말로 소통하는 일상 속에서 느닷없이 돌진해 오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답도 없는 호기심, 나는 그것을 진지하고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받아치기 위해 그저 문학책을 읽었다. 답이 없다는 걸 알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오랜 독서 습관이란 정말 무섭고 징그러운 것이니까.) 그런 나의 느닷없는 행위 일체는 김현 평론가의 말처럼 일종의 ‘문학 행위’였다. 창작자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일개 문학 독자에게도 문학 행위라는 것은 허락되는 것이다!


음, 그렇다면 최근 내게 많은 생각을 안겨준 문학 행위를 하나 짧게 소개해볼까 한다. 그 시작은 바로 우연히 읽은 시 한 편이었다.


나에게서 인간이란 이름이

떨어져 나간 지 이미 오래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흩어지면 여럿이고

뭉쳐져 있어 하나인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왜 날 이렇게 만들어놨어

난 널 해치지 않았는데

왜 날 이렇게 똥덩이같이

만들어놨어, 그러고도 넌 모자라

자꾸 내 몸을 휘젓고 있지

조금씩 떠밀려가는 이 느낌

이제 나는 하찮고 더럽다

흩어지는 내 조각들 보면서

끈적하게 붙어 있으려 해도

이렇게 강제로 떠밀려가는

변기의 생,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최승호 <무인칭의 죽음>


아, 대놓고 나를 보는 것만 같은 이 더럽고 찜찜한 기분. 나름 열심히 살아보겠다며 발악하지만 도대체 나라는 놈이 누구인지 나조차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고 남들과 같은 생각과 비슷한 옷차림으로 간신히 멋진 사람이고자 떼쓰는 나를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 속에 갇혀 기분이 더러워질 때, 나를 위로해주는 건 또다시 문학이다(대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문장에 기대게 된다). 그렇게 나는 고개를 돌려 더 좋은 생각을 찾아 나선다.


눈 덮인 숲 속의 나무들은 눈과 숲의 익명성 속에서도 개별자로서 외롭거나 억눌려 보이지 않았다. 나무의 개별성과 숲의 익명성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이나 구획이 없었다. 나무는 숲 속에 살고, 드문드문 서 있는 그 삶의 외양으로서 숲을 이루지만, 나무는 숲의 익명성에 파묻히지 않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는 외롭지 않고, 다만 단독 했다.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나무의 단독, 숲의 핵심이자 본질인 나무는 어울리면서 동시에 단독 한다. 나는 여기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실마리를 조금은 찾은 기분을 느꼈다. 일종의 위로랄까. 나무처럼 살자. 숲도 이루고, 스스로 단독 하기도 하면서 뚝심과 유연성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자는 것. 감사합니다. 훈 센세...


스페인 궁정화가 고야 <모래에 파묻히는 개>


밀려 내려오는 모래 속을 허겁지겁 헤엄쳐 건너가는 듯한 개의 머리를 보여주는 단순한 그림, 마치 인생의 급류를 허겁지겁 헤쳐나가려고 노력하는 나를 보는 것만 같다. 나는 개의 눈빛에 집중한다. 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지점을 노려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내게는 문학이 바로 그것이다. 인생에 대한 정답 없는 질문과 물음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는 그 강렬한 눈빛, 내게 문학이란 그런 것이다.


“문학이란 답도 없는 것, 하지만 늘 기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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