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혹은 패션 인플루언서 혹은 테이스트 메이커
RUN DMC, LL COOL J, Dapper Dan*, Puff Daddy, Jay-Z, Wu-Tang Clan과 같이 힙합 스타일링의 선도적인 길을 제시한 선구자들부터 남다른 패션 철학과 트렌드 설정 능력으로 힙합 씬이라는 제한된 구역을 가뿐히 뛰어넘어 하나의 사회문화적 상징을 만들어가고 있는 퍼렐 윌리엄스와 카니예 웨스트까지, 이들은 ‘미국 힙합 그리고 패션'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아마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질 주요 인물들이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들의 혁신적이고 때로 파격적인 스타일링과 똑똑한 브랜드 선택의 지점은 힙합 씬뿐만 아니라 패션 분야로까지 뻗어 가 새로운 영감의 싹을 심고 생각의 물꼬를 터주었음이 자명하다.
그렇게 윗세대의 생산적인 노력으로 거듭 진화와 발전을 거듭한 미국 힙합 패션 분야에서 최근 들어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스키니한’ 흑인 래퍼들이 디자이너 패션쇼 런웨이의 모델을 방불케 하는 스웨그를 보여주며 스타일 인플루언서로서의 역할을 적극 수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는 럭셔리 디자이너 브랜드와 미국의 래퍼들을 나란히 병치해도 더는 조금의 위화감도 주지 못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는 궤멸하여 종적을 감춘 지 한참이지만, 오버사이즈 티셔츠에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벨트, 팀버랜드 부츠와 듀렉 또는 스냅백을 쓰고 힙합 정신을 표출하려 드는 종족이 혹시라도 존재한다면 그들은 과거로부터 불시착한 외계인 소리를 들으며 힙합 씬으로부터 강퇴당할 것이다.
각종 디자이너 브랜드의 패션쇼 현장에서 이제 스키니한 흑인 래퍼 하나쯤 찾는 건 일도 아니게 되었다. 그들은 당당하게 차려 입고 누구보다 주목을 받는다. 그들은 ‘래퍼’ 또는 ‘힙합’이라는 우산 아래에 숨어 있다가 패션계의 잔치에 깜짝 등장해 뻔하지 않고 예측이 불가능한 ‘의외성’이라는 무기를 들고 활보한다. 누가 뭐래도 '자기표현'에 거리낌 없는 힙합 정신의 그 위대한 뻔뻔함은 어딜 가나 통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정통 뉴욕 할렘 출신 래퍼 Asap Rocky에이셉 라키가 있다.
에이셉 라키는 디자이너 패션 브랜드가 힙합과 몸을 섞는 순간의 관습적인(?) 위화감을 완전히 깨부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본인을 Fashion Killa로 자칭하는 이 젊은 래퍼 에이셉 라키를 빼놓고 오늘날의 힙합 패션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승리를 빼놓고 대한민국 클럽 씬을, 정준영을 빼놓고 한국의 몰래카메라 시장을 논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될 테니까.
2011년, 싱글 Purple Swag*를 통해 스트리트에서 꽤나 유명세를 떨친 에이셉 라키는 이후 발표한 곡 Peso*, ‘Goldie*’, ‘F**ckin’ Problems’의 연이은 히트로 미국 힙합 씬의 라이징 스타로 급부상한다.
정통 뉴욕 할렘가 출신 래퍼인 그는 2011년 'Live.Love.A$ap'이라는 믹스 테이프의 성공적인 데뷔를 마치고 Polo Grounds Music/RCA Records와 무려 3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한다. 에이셉 라키는 이후, 2012년 데뷔 앨범 'Long.Live.A$ap'으로 빌보드 1위를 차지하며 성공적인 커리어의 신호탄을 날린다. 그리고 2015년, 2018년의 정규 앨범을 비롯해 여러 장의 싱글을 꾸준히 발표하며 힙합 씬의 간판 ‘랩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의 에이셉 라키를 만든 건 분명 8할이 ‘패션’이다. 정확히 비율은 계산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를 둘러싼 버즈들을 실감으로 계산해보면 ‘패션’이나 ‘스타일’이라는 키워드가 8할 정도는 차지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랩스타’라는 수식어보다 '패셔니스타'라는 형용이 더 잘 어울리는 듯한 그는 한 인터뷰를 통해 스스로를 이렇게 칭한다.
“난 게토-힙스터라구!"
2011년에 발표한 싱글 ‘Peso’에서 그의 이런 스웨그는 꽤 인상적이다.
“Swagger so impressive and I don’t need a necklace, But these bi*ches get impressed when you pull up in that 7, Them 6’s them benzes, I gets get the freshest, Raf Simons, Rick Owens usually what I’m dressed in”
"스웨그 좀 쩔지, 목걸인 필요 없어. 근데 이 X들은 (BMW) 7시리즈나 6시리즈, 뭐 벤츠 타면 좋아하더라고. 난 쌔삥만 취급해, 내가 입는 건 라프 시몬스와 릭 오웬스지."
Asap Rocky 'Peso'
여자, 돈, 자동차 그리고 주얼리와 같은 힙합의 전통적인 클리셰를 지양하는 삶을 추구하는 에이셉 라키는 이러한 가치관에 걸맞도록 자신의 패션 스타일링을 운용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미 스웨그이기 때문에) 목걸이 따윈 필요 없다는 그는 ‘Peso’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패션 브랜드(디자이너) 라프 시몬스와 릭 오웬스를 향해 대놓고 샤라웃을 날린다. 물론 이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부터 힙합 뮤직 비디오를 즐겨 보며 패션과 스타일에 눈을 뜬 에이셉 라키는 '힙합'을 통해서 패션 브랜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뮤직 비디오 속 GUESS, TOMMY HILFIGER, ADIDAS, GAP 그리고 심지어 OLD NAVY와 같은 패션 브랜드들은 그를 강하게 자극했다.
"패션은 항상 내 옆에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난 완전히 패션에 미쳤었다구요."
2012년, 에이셉 라키는 ‘Fashion Killa’라는 3분 56초짜리 곡을 통해 무려 27개의 패션 브랜드(Prada, Dolce & Gabbana, Escada, Balenciaga, Helmut Lang, Alexander Wang, Donna Karan, Cartier, Jean Paul Gaultiers, Jil Sanders, Oliver Peoples, Ann Demeuelemeester, Visvim 외 다수)를 미친 사람처럼 나열했다. 에이셉 라키 본인은 정작 ‘Fashion Killa’와 같은 유치한(?) 노래를 발매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 부끄럽게 생각하는 듯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노래가 힙합 씬이 품을 수 있는 스타일의 스펙트럼을 넓혀주었고, 후배 래퍼들의 패션 브랜드 선택 지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는 노래 속에서 이렇게 외친다.
“내가 좀 트렌디한 놈이야”
스트리트 웨어부터 럭셔리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데뷔 이래 진보적인 스타일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에이셉 라키는 ‘패션’과 ‘스타일링’ 그리고 ‘브랜드’ 자체에 아주 깊이 취해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난 디자이너는 아니에요. 그게 내 지향점이에요. 난 단지 패션 감각이 좋은 테이스트-메이커죠."
"패션은 내게 종교예요."
베이프, 빌리어네어 보이즈 클럽, 후드 바이 에어 등의 스트리트웨어를 입던 커리어 초창기를 지나 그는 디올 캠페인, 캘빈 클라인 캠페인, J.W Anderson과의 컬래버레이션, GUESS 컬렉션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신나게 옷을 입어재낀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서서 천연스럽게 자기를 보여주며 온몸으로 멋을 표출한다. 음, 이런 말풍선과 함께.
"요즘엔 이런 게 먹혀. 날 보고 트렌드를 배워!"
2017년에 발표한 싱글 'RAF'에서 그는 대놓고 남성 명품 브랜드 'Raf Simons'를 찬양한다. 벨기에 출신 패션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가 1995년 만든 럭셔리 맨즈웨어 브랜드 'Raf Simons', 이 브랜드를 두고 에이셉 라키는 '패션의 미래를 그리는 최고의 브랜드'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실제로 에이셉 라키는 2013년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의 Dior 패션쇼와 2017년 Calvin Klein 데뷔 무대에 참석해 라프 시몬스와의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RAF'의 뮤직 비디오에서 그는 1995년의 라프 시몬스 데뷔 컬렉션 의상을 입고 그의 스키니 블랙 동료 래퍼 Playboi Carti 그리고 Quavo와 함께 한껏 멋을 부린다. 사실 이건 뮤직 비디오라기보다는 컬렉션 홍보 영상에 가까워 보인다.
에이셉 라키가 뮤직 비디오, 패션쇼. 콘서트의 무대 위에서 추구하는 패션의 멋, 그리고 스타일 강박은 기록으로 남아 그 자체로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후배들은 보고 배우고 꿈꾸고, 동료들은 보고 배우고 함께 시도한다. 에이셉 라키가 지닌 패션에 대한 열정의 표출은 결국 힙합 씬 전체의 패션 센스 상향 평준화를 가져오는 일종의 교과서가 된다.
"이 씬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머리를 따야 한다든가 금니(그릴즈)를 껴야 한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이 있잖아요. 근데 패션 센스를 가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물론 힙합 씬에도 패션 센스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죠. 근데 고작 카니예 웨스트나 퍼렐 그리고 퍼프 대디 정도가 전부잖아요. 그게 기준점이라구요. 좀 뭔가 색다른 맛이 있어야죠. 우린(에이셉 라키가 소속된 크루 Asap Mob) 힙합에 그걸 가져왔어요."
2018년 정규 앨범 ‘TESTING’의 수록곡 ‘Fukk Sleep’의 뮤직 비디오 속에서 그는 어김없이 Alexander Wang, Alyx, Martine Rose 그리고 Raf Simons를 멋지게 빼입고 등장해 뉴욕을 뒤집고 다닌다. 그가 어떤 일을 벌이든 그는 ‘패션’을 중심에 두는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예술가에게는 반드시 집착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Coco, Celine, Tiffany, she flossy
I remember I was pooring
I was young and living homeless
Now I rock the Ricky Owens
Asap Rocky ‘Fukk Sleep’
소설 첫 문장의 ‘조사’ 하나를 가지고 며칠을 고민하며 담배 한 갑을 태웠다는 작가 김훈이나 촬영장 소품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쓴다는 박찬욱 감독처럼 에이셉 라키에게 ‘완벽주의’란 무엇을 노래하고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무슨 말을 내뱉든 ‘패션’을 함께 엮어내 그럴듯한 작품을 지어내는 것이다.
명품 브랜드로 온몸을 휘감은 래퍼들의 모습은 너무 흔해서 조금도 놀랍지 않다. 십 년 전에도, 이십 년 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에게서 남다른 ‘패션 철학’을 발견하는 건 조금도 흔하지 않았다. 자기 과시를 위한 스타일링을 넘어서 패션 그 자체를 사랑하고 즐기는 에이셉 라키의 진심은 그렇게 미국 힙합 씬에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진심은 통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진심은 늘 사람들을 움직이니까. 그는 진짜배기 ‘트렌드 세터’이다.
<스눕피 참견>
* Dapper Dan
1980, 90년대 활약한 뉴욕 할렘가의 패션 디자이너, 과거 구찌, 루이뷔통, 펜디 등의 고유 스타일을 베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였고, 바비 브라운, 엘엘 쿨 제이, 에릭 비 앤 라킴, 타이슨 등 유명 인사들의 맞춤 의상을 제공하면서 유명해졌다.
+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 대퍼 댄은 과거 구찌 디자인 도용으로 소송을 당한 이력이 있는데, 시간이 흘러 구찌 측은 역으로 대퍼 댄의 디자인 도용 건으로 역소송을 당했다. 그러나 2018년 구찌와 대퍼 댄은 공식 협업 컬렉션을 출시한다. 진정한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승자는?
* Purple Swag
감기약 시럽과 탄산음료 등을 섞어 만드는 일종의 마약인 Purple drank(lean)에 취해 high해진 상태의 스웨그
* Peso
돈을 대변하는 화폐 단위인 페소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먼저 세상을 떠난 에이셉 라키의 친구 peso를 중의적으로 담아낸 표현
*Goldie
1974년작 영화 'The Mack'의 주인공 Goldie
<내용 참조>
https://www.nytimes.com/2015/03/08/t-magazine/hip-hop-fashion-style.html
https://www.highsnobiety.com/2017/05/17/asap-rocky-fashion-hip-hop/
http://vitaemoderna.com/2018/11/05/asap-rocky-fashion-icon-of-today/
https://www.esquire.com/style/mens-fashion/advice/g3470/best-asap-rocky-style-outfits/?slide=5
https://www.complex.com/style/2016/06/how-asap-rocky-became-the-face-of-luxury-fashion
* 메인 화면 사진 출처(Highsnob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