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눕피 Jan 24. 2020

'무지티 브랜드'라는 말이 조금 웃기지 않은가?

무지티, 무지 티셔츠, 무지 티셔츠 브랜드에 대한 엉뚱한 단상



결딴을 내고자 칼로 토막을 낸 낙지를 두고 모두가 '산-낙지'라고 부르는 일의 잔인함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처참히 반쯤 죽여놓은 낙지를 '산-낙지'라고 부르는 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 사람들에게라도 딱 반만 산 낙지, 즉, '반-산낙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끝내 생각했다. 시속 70km 제한 속도를 자꾸만 걸어놓아 굼뜨게 움직이는 경인고속도로 위의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국가는 '고속도로'라는 표현을 당장 취소하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 일이 있다. 그것이 너무 극단적인 처사라면 국가는 국민을 위해 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에 한해 '저속도로'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전면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끝내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최종적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집에서 무지티(무지 티셔츠)를 자주 입는다. 여름철의 경우에는 외출복으로도 무지 티셔츠를 즐겨 입는데, Gildan길단, Fruit of The Loom프룻 오브 더 룸, Comfort Colors컴포트 컬러스라는 브랜드를 특히 좋아한다(굳이 더 따지고 들어가자면 컴포터 컬러스가 그 빈티지한 외형과 부드러운 착용감 때문에 최고라고 생각한다). 영어로도 Blank T-Shirt라고 부르는 '무지 티셔츠'의 '무지'는 '없을 무'에 '땅 지'자를 쓴다. '무늬가 없이 전체가 한 가지 빛깔로 됨. 또는 그런 물건'을 뜻하는 '무지'라는 명사와 티셔츠라는 명사를 더한 것이다. 누가 최초로 만들어 쓴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지 잘 만든 명사라고 생각한다. 무지 잘 만든 표현인 '무지 티셔츠'를 줄여서 '무지티'라고 부르는 걸 모르는 사람은 무지한 거지?



무지 티셔츠 업계의 포식자 GILDAN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1984년에 태어난 브랜드인데, 우리가 잘 아는 ALSTYLE, American Apparel 등을 날름 먹어치웠다.



가성비 좋은 무지 티셔츠를 찾는 당신께 자신 있게 Comfort Colors를 권합니다. 무심하게 잘 입으면 카니예 웨스트의 간지를 약 40%까지 살릴 수 있습니다.


'무지 티셔츠' 또는 '무지티'라고만 이야기할 때는 별로 어색하지 않은데, '무지 티셔츠 브랜드'라고 말할 때는 이상하게 뭔가 부자연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간신히 무늬를 없애고 자기의 정체성을 숨긴 채 안도의 한숨을 쉬며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거나 한숨 자고 있는 수줍은 티셔츠를 붙들어 깨워 다시 한번 억지로 브랜드를 부여해 괴롭히는 인간의 노력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인 것만 같은 거다.



그 티셔츠 브랜드가 뭐야?
무지 티셔츠.
그러니까, 그 무지 티셔츠, 브랜드가 뭐냐고!
그래, 무지 티셔츠라니까.
이 개새끼.



어제오늘 스마트폰을 붙들고 '무지 티셔츠' 브랜드의 종류와 역사에 대해 구글링을 했다. 외출할 때 책을 안 가지고 나가면 이 사단이 나는 것이다. 평소 자신감 있는 인물과는 거리가 먼 나인데 이상하게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쏟는 걸로 순위를 매긴다면 대한민국 상위 1% 안에 들 자신이 있다면 근거가 없는 자신감인가?


아무튼 '무지 티셔츠' 브랜드에 대해 공부하다가 굉장히 흥미로웠던 지점은 'Fruit of The Loom'이라는 미국 무지 티셔츠 브랜드의 역사였다. 우리가 흔히 오래된 미국의 브랜드를 생각할 때 코카콜라나 리바이스 정도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은데(내 생각인가?), 'Fruit of The Loom'은 코카콜라와 리바이스보다 선배다. 무려 1851년에 회사를 설립했고, 1871년에 공식 상표 등록을 했는데, 미국 상표 번호 418번이라고 한다(이런 걸 왜 알아야 되지?). 심지어 세계 최초의 전화기와 전구보다도 먼저 나온 브랜드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니 '무지 티셔츠 브랜드'라는 표현을 어색하게 생각한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무지 예쁜 브랜드 (이미지 출처: Fruit of the Loom)




2001년, 재정 문제를 겪어 오던 Fruit of The Loom을 사들이기로 결정한 건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맥도날드'라는 브랜드의 맥모닝 세트를 즐기고 '코카 콜라'라는 브랜드의 콜라를 입에 달고 사는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 할아버지였다. 오랜 역사에 기반한 'Fruit of The Loom'이라는 브랜드의 힘을 믿었다나?


매해 워렌 버핏과의 점심 식사권 경매를 두고 말이 많던데, 이번 생에는 이뤄질 일도 없겠지만 만일 내가 워렌 버핏 선생님과 점심을 한 끼 하게 된다면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아래의 질문을 던지며 얼음을 깰 것이다.


무지 티셔츠 브랜드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프런트 이미지 출처: Fruit of The Lo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