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눕피의 단상단상(26)
"이봐,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뭔가 의견을 말했다 해도 그걸 최종적인 거라곤 생각하지 마. 나는 자네보다 힘이 세고 더 남자다우니까 말이야."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 4학년 때 같은 클럽에 속해 있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가 나를 좋게 여기고 있고, 퉁명스럽고 도전적이기는 하나 어딘지 아쉬운 듯한 태도로 나의 호감을 사고 싶어 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나는 학창 시절 친구들과 치고받고 싸워본 경험이 없다.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때려본 적도 없고 누군가로부터 맞아본 일도 물론 없다. 친구들과 사소한 일로 다투고 토라지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격정적인 분노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아 주먹이 오고 갔던 극단적 상황은 정말이지 단 한차례도 없었다. 선생님들로부터 이유 없이 얻어터졌던 중등학교 시절의 몇몇 부당한 사건이 기억나는데, 그러한 사건들을 논외로 한다면 말이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계급' 논리라는 건 정말 엄정하다. 특히 중등학교 시절에는 '주먹'으로 클래스가 명확히 나누어지는 데, 나 같은 쭉정이는 사실 어떠한 계급에도 속하지 못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 그것이 나의 계급이라면 계급이었다. 남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온 내가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 남기 위해 택한 처세의 기술은 일단 친절하게 굴고 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언행에 가식을 박는 것이었는데, 오랜 시간 정을 나눈 불알친구를 제외한다면 나는 마치 성인이 된 이후 사회생활을 할 때처럼 예의를 갖춰 학교 친구들을 대했다. 친절, 봉사라는 키워드는 그렇게 내 학창 시절을 관통하는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착한 척, 친절한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일이 꽤나 힘들었다. 태생적으로 불만이 가득한 기질을 가져서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나의 '척'에 깜빡 속아 하나둘씩 내게 다가와 친해지길 바라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꽤 괜찮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착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계기에 힘 입어 나는 조금씩 더 그런 삶의 태도를 밀어붙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나는 지금도 인간관계에 있어서(특히, 동성 사이에서) 웬만하면 갈등 상황을 만들지 않고 무슨 일이든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노력해오고 있는데, 학창 시절의 가식적 연기로부터 출발하여 일상적 태도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의 습관이 되어 몸에 배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되도록 센 척을 지양하고 아는 척을 자제하며 정중하게 대하면 웬만한 남자들은 나를 적수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수평적 관계가 설정되면 조금 더 편한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내가 몸을 숙이면 숙일수록 오히려 상대가 나를 하대하거나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나는 남자이면서도 가끔은 남자의 마음을 제일 모르겠다. 이건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어찌 보면 도리어 비겁한 태도에 가깝기에 부러 떠벌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나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줄곧 따르고 있다.
다음 생에는 나도 멋지게 쌈박질도 하고 정의의 사도처럼 꼭 필요한 싫은 소리도 팍팍 던지면서 쿨하고 터프한 남자로 살아볼까 한다. 비겁하고 시시한 이번 생은 글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