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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Apr 19. 2019

아무리 컨셉이라도 지나치면 별로야.

더 콰이엇의 앨범 [Q Day Remixes]를 듣다가 화가 좀 났다.

몇 년 전 도끼와 더 콰이엇이 한국 힙합씬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을 때, 나는 오랜 힙합 팬의 한 명으로서 진심으로 기뻤다. 한국에도 랩스타가 생기는구나! 한국에서도 이젠 힙합으로 돈을 버는구나! 사실 그들의 비트와 멜로디는 미국 힙합의 그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고 라이프스타일과 컨셉마저도 미국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한 모습이었지만, 한국에서 이런 음악과 이런 가수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아주 지루한 표현이지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니까 그 정도 베끼기 쯤이야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한국 힙합 씬이 하나의 챕터를 마감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중요한 지점을 일리네어 레코즈의 1집 앨범 [11:11]의 발매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앨범 [11:11]은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 DJ Mustard나 Young Chop 등이 이미 제시한 바 있는 트렌디한 트랩 비트의 재현물이자(물론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서던 힙합 프로듀서들의 영향 아래에서) 그들이 동경하던 미국의 래퍼들(Meek Mill, Ace Hood, Tyga, Rick Ross 등)의 라이프스타일과 컨셉에 한국적 감성을 약간 스푼 정도 첨가한 결과물이었다. 솔직히 미국의 힙합 음악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즐겨온 리스너였다면 [11:11]을 들으며 그 정도는 쉽게 알아챘을 것이라고 본다.


앨범 발매 즈음 나는 일리네어 레코즈의 [11:11]을 정말 질리도록 들었다. 그때의 내 상태는 마치 이런 느낌이었다. 직접 비행기 표를 끊어 외국으로 날아갈 여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서구권의 트렌디한 음식에 대한 치솟는 니즈, 즉, 강력한 내재적 동기를 이겨낼 자신은 없어서 '대한민국st' 즉, 보급형으로 그것들을 발 빠르게 제시하는 대기업 계열 식품 유통사의 자비에 끝내 굴복하는 상황 같은 것. 어딘가 맛이 부족하다고 툴툴거리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다음 한입을 깨물어 먹어야만 하는 힘없는 소비자의 어떤 일면 같은 것(내가 쓰고도 무슨 소린지?).


(혹시나 오해할까 봐 밝혀두자면) 나는 도끼와 더 콰이엇을 좋아한다. 이전 게시물 몇 개만 보아도 그들에 대한 나의 애정을 확인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하나의 사회문화적 현상을 이끌어 낸 그들의 개척 정신과 지능적인 컨셉 메이킹 능력은 높이 사야 마땅하다는 내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들이 만든 앨범 [11:11]이 제시한 래퍼들의 이상적 라이프스타일과 음악적, 사업적 방향성이 후배들에게 가 닿았을 때, 가끔 이상한 쪽으로 그것들이 발현되어 보고 듣기 민망한 노래가 탄생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잡소리가 길었는데,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건 래퍼 더 콰이엇의 가장 최신 앨범 [Q Day Remixes]의 'Money Over Bullshit Remix'에서 그의 후배들(식케이, 슈퍼비, 창모)이 보여준 과유불급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젠 지긋지긋한 돈 얘기를 또 떠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들의 상스러운 태도 때문이었다. 오랜 힙합 팬이라는 놈이 왜 이렇게 속이 좁아터졌냐고? 네가 요즘 힙합을 알기나 하냐고? 아, 그런 거북한 비판들이 여기까지 들리지만 어쩔 수 없다.



앨범 [Q Day Remixes] / 출처: Mnet




"이 어린 새끼가 뭘 하려고만 하면 다 지랄부터 해 근데 상관 안 하고 하고 싶은 걸 해 그게 뭐든 난 너희를 만족시킬 생각이 없기에'


"취향 구린 니 놈 개소리에 비해 객관적이게 숫자로 패 at 국민은행"


"이거 어디서 났게? 니 여자 친구 skirt"


"내 거시긴 늘 hard 하루하룰 따먹네"


"나는 내 좆대로 살어"


"씨발넘아 먹어 fuck 평생 너넨 못 쳐 떡"


"죽었다 깨어나 니가 환생하면 나방 혹은 다른 bugs"


The Quiett 'Money Over Bullshit' 중에서




아, 이 상스러운 가사들의 향연을 보라! 이 노래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를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면 뭐 이 정도로 추려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오만불손

2. 정준영

3. 최종훈

4. 승리

5. 로이킴

6. 유아독존

7. 내가 망할 것 같아?


특권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깔보는 젊은이는 언뜻 쿨해 보이지만, 실은 천박해 보일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태도는 언뜻 똘똘해 보이지만, 실은 거북할 뿐이다. 통렬한 표현과 상스러운 표현은 한 끗 차이이다. 이러한 것들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면 뭔가 큰 것을 놓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항상 과하게 나가는 걸까. 아, 진짜 저런 상스러운 표현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티스트에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간직한다는 건 필수적인 일이지만, 그게 지나친 아집으로 나타나면 보고 듣기 민망할 뿐이고 쓸데없이 과한 자극은 그 어떤 감동도 주지 않는다. 듣는 사람의 기분은 그저 별로다.


도끼와 더 콰이엇은 랩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각종 기회의 땅을 먼저 발견해 직속 후배들에게 친절히 소개해주었다. 미국 래퍼들의 스웨그 넘치는 멋진 삶이 한국에서도 가능하다는 걸 자동차와 시계 그리고 집으로 증명도 해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요즘의 대한민국 래퍼들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를 만들고 한탕주의적 가치관에 불을 지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내 좆대로' 사는 것이 어찌 쿨하고 멋진 삶이 아니겠는가. 그건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삶이니까. 하지만 뭐든지 정도껏 해야 한다. 지금 저들의 가사 속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돈뭉치를 믿고 뻐기는 어린놈들의 근거 없는 허황한 자신감과 리스너와 팬들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하고 독단적인 태도일 뿐이다. 저런 가사가 반복되면서 저런 류의 래퍼들만 끝없이 양산될까 봐 심히 걱정된다. 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인다고? 래퍼들이 자주 내뱉는 표현인 '기믹'도, 내가 좋아하는 표현인 '컨셉'도 지나치면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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