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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Oct 17. 2018

누구나 음악에 빠져드는 계기가 있다.

지금의 당신을 만들어 준 가수는 누구인가요?

누구나 좋아하는 가수와 음악 하나쯤 있다. 좋아하는 가수와 음악이 없는 사람을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대개 한 사람이 난생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가수의 음악 색깔은 이후 자신의 평생 음악 취향을 결정해버린다. 비슷한 음악을 계속 찾아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해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가며 두근거렸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는 것과 유사하다.


2003년에 나는 미국 힙합 그룹 우탱클랜의 1집 앨범 Enter the Wu-tang(36 chambers)을 구매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첫째, 그것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생 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등과 더불어 기본적으로 나의 보여주기식 허영을 위한 도구였다. 둘째, 좋은 가수란 그저 높은 음을 수월하게 잘 내고 악을 쓰며 노래를 불러 젖히는 가수이고 좋은 노래란 샤우팅으로 시작해 샤우팅으로 끝나는 노래라는 것에 모두가 의견을 같이하던 학급 풍토와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명저의 반열에 오른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위시한 무려 MBC가 공인한 책들이 온 학교를 한방에 장악하던 살벌한 풍경 속에서, 그저 조금 '다르게' 살아보려는 발악이자 어쭙잖은 깝죽거림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는 그야말로 죽은 듯이 살았다. 괜스레 화만 내는 선생님들과 좀스럽게 센 척하는 선배들, 서로의 계급을 확인하기 위해 매일 부지런히 벌어지던 쌈박질과 그것이 불러오는 수선스러움은 나를 아주 짜증 나게 했고 살맛 나지 않게 하였다. 나는 장난이나 치면서 실실대고 싶은데, 총체적으로 과격하기만 한 남자 중학교의 분위기는 나를 못살게 굴었다. 반 배치고사와 중간고사의 결과로 난생처음 목도하게 된 수직 서열화와 점수와 등수에 따라 냉엄하게 차별의 칼날을 휘두르던 선생님들의 모습은 소심하고 여린 나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런 것들을 열심히 잊어버리기 위해 나는 방과 후 내가 몰두할만한 것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힙합 음악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나는 나잇값을 못 하고 MF와 FUBU, 칼카니와 같은 힙합 의류 브랜드에 빠져있었다. 주말이 되면 엄마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들러 맞지도 않는 힙합 청바지를 억지로 입어보고는 그것을 소화하지 못하는 나의 볼품없는 초등 몸매가 너무나 미워 마구 슬퍼하였고, 그렇게 황당한 이유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나는 이미 에미넴의 3집 앨범, 2001 대한민국(천리안), 드렁큰 타이거의 3집 앨범, 주석의 1집 앨범, 윤희중의 2집 앨범 등을 우연히 접하면서 힙합의 알 수 없는 운명적 끌림에 굴복한 상태였고, 힙합 음악을 '내 인생을 밝힐 등불'로 규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구절절한 배경 속에서 드디어 2003년, 나는 앞서 밝혔듯 중학교 생활에 대한 환멸을 크게 느낀바 내 시간의 많은 부분을 하나에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현실 속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로 했다. 반복하여 말하건대 그것은 힙합 음악 감상이었다. 기왕 힙합 음악을 즐기기로 했으니 나는 미국의 정통 힙합에 다가가 보기로 했다. 내가 알던 유일한 미국 힙합 뮤지션이었던 에미넴의 음악과 한국 래퍼들의 음악은 어딘지 모르게 간지러웠다. 내겐 조금 더 확실한 자극이 필요했다.

2003년의 어느 주말, 나는 신나라 레코드의 국외 음반 코너, 그 중에서도 힙합 섹션 앞으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들고 갔다. 예상보다 그곳엔 앨범이 너무 많았다. 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앨범을 모두 사서 집에 가져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몹쓸 물욕이 일었다. 그때의 나는 미국 힙합 명반에 대한 대강의 사전 인터넷 검색을 마치고 난 후였는데, 그에 따라 몇 가지 익숙한 앨범들이 눈에 걸렸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는 두 가지의 앨범을 손에 쥐고 놓지를 못했다. 하나는 퍼블릭 에너미라는 아재들의 2집 앨범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탱클랜이라는 떼거지들의 1집 앨범이었다. 나는 지갑 사정을 고려해 나의 시각을 조금 더 확실하게 자극한 우탱클랜의 1집 앨범을 구매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해서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야동을 보았다. 아니, 소니의 cd 플레이어를 준비하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 CD를 돌렸다.


Shaolin shadowboxin and the Wutang sword style...

 

1번 트랙 'Bring da Ruckus'가 흐르기 시작하고 나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프로듀서 RZA의 철저히 미쳐버린 비트와 멤버들의 광기 서린 살풀이 래핑은 나를 흥분하게 했다. 이미 나는 뉴욕에 있었다. 회색 도시 뉴욕의 칙칙한 먼지 냄새가 났다. 사실 그것은 내 방의 먼지 냄새였다. 나는 12개의 트랙 여행을 간신히 끝마쳤고, 그날의 음악 감상은 과연 내 인생의 사건이 되었다. 그들은 그토록 조옷같은 현실을 탈피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탕주의가 만들어낸 떼거지들의 투박한 수작은 10년이 지난 2003년 한반도의 한 중학 1년생의 질풍노도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2018년의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따분해 곧 죽을듯했던 내 중등학교 시절을 살맛나게 해주었으니까. 어른 사회의 통념과 달리 시끄럽고 쓸데없이 욕만 해대는 힙합 음악이 얼마나 멋지고 쿨하고 진짜 '개쩌는' 것인지 알려주었으니까.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 플레이리스트엔 QUAVO와 DRAKE의 어떤 음악들이 버젓이 올라가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것들은 나를 여전히 흥분시키니까.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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