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발가락이 계란 한 알만한 사람도 있다니까요.
미국의 소설가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대학을 중퇴하고 신문기자를 한 이력이 있다. 그 시절 직업상의 이유로 또는 기분 전환을 위해 그는 자주 거리를 걸었다고 하는데,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거리를 걸으면서 자신과 자신의 일을 어떻게 하면 이롭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삶과 행동을 바라보는 일에 주로 집중했다고 한다. 다양한 사건과 인물을 부단히 만들어내야 하는 소설가에게 있어 관찰하는 습관의 중요성은 필력이나 이야기 구상 능력만큼이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비단 작가뿐만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성의 공습 속에서 최대한으로 따분하지 않은 삶을 살아 나가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찰은 아주 유용한 삶의 도구가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들은 너한테 관심 없어.”라든가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한테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라는 식의 말은 내가 인생을 살아오며 여태껏 가장 동의하기 힘들었던 의견 중 하나이다. 내가 만약 누군가에 의해 다른 사람들한테 별 관심 없는 숱한 사람들 중 하나로 거칠게 분류된다면 어쩐지 나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한테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니, 정말 그렇게들 관심이 없나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캐릭터의 인간 군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보관하는 서랍(?) 같은 것이 있어서 작품을 지을 때면 언제든지 그것을 열어 필요한 순간에 인물을 하나하나 꺼내 쓴다고 말했었다. 다른 사람들의 자질구레한 일상 하나하나를 궁금해하고 사소한 습관과 행동을 관찰하기를 즐겨 온 내게도 그런 서랍이 분명히 몇십 개쯤은 존재하는 것 같다. 소설가가 아니기에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는 큰 숙제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누구한테 돈 주고 팔 수 있었다면 서랍 몇 짝은 이미 팔려나가고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어김없이 아주 인상적인 관찰의 경험을 두 가지 했는데, 그것들은 꽤 매력적이었다.
첫 번째 경험은 인천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광역버스 안에서 만난 한 남자의 발가락에 대한 이야기이다. 버스에서 만난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옆자리의 남자는 비가 내려 쌀쌀한 4월 초의 날씨가 무색하게 발목이 보이는 치노 팬츠를 입고 당당히 보라색 플립플랍을 신고 있었는데, 다른 게 아니라 보라색 플립플랍 위에서 꼼지락대는 그의 엄지발가락이 내 엄지발가락 약 세 개 정도를 합친 것의 크기와 비슷해서 대단히 놀랐다. 화들짝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면 과장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믿지 않아도 할 수 없다.
그의 엄지발가락을 발견한 순간, 나는 그의 계란 한 알만한 크기의(그것도 소위 왕란이라고 부르는 계란의 크기만큼 컸다.) 엄지발가락을 훔쳐서 달아날까 라고도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그의 거대한 엄지발가락은 그의 자긍심일 수도 어쩌면 콤플렉스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나는 그의 엄지발가락이 마냥 부러웠다. 나는 그 무엇으로 남의 시선을 그토록 강렬하게 빼앗을 수 있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두 번째 경험은 마을버스에서 만난 남자 중학생들의 인상적인 대화에 관한 이야기인데, 나는 살면서 한 도시를 이보다 더 간편하고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남학생 A) "야, 거기 어디지?"
남학생 B) "어디?"
남학생 A) "우리 수학여행 갔던 데 있잖아, 병신아."
남학생 B) "어디? 병신아!"
남학생 A) "거기, 그 졸라 뜨거운데."
남학생 B) "어디?"
남학생 A) "거기 철 있고 졸라 뜨거웠던 데."
남학생 B) "포항?"
남학생 A) "아, 맞다. 포항!"
그들은 언젠가 포항 제철소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철이 있고 졸라 뜨거운 도시, 그곳은 바로 포항이다.
학창 시절, 나는 어떤 연유로든 종이에 '존경하는 인물'을 적어 넣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시트콤 작가와 소설가를 적어 넣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늘 남 보기에 그럴싸한 또는 무난한 위인을 하나 골라 적어 넣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며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내 마음속 존경 인물 0순위는 언제나 일상의 아주 작은 경험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소소한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시트콤 작가와 일상적 대화와 비일상적 상상으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소설가였다. 그런 연유로 중학교 시절에는 김병욱 PD의 역작인 '똑바로 살아라'라는 시트콤을 본방송으로 보는 일과 영풍문고의 소설 코너에서 새로운 소설책을 하나 사보는 일이 내 인생을 밀고 나가는 큰 힘 중 하나였다.
일상의 디테일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우며 술 먹고 싶다. 무겁고 진중한 주제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의 엄지발가락 크기와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나 마구 늘어놓으며 아무 생각 없이 깔깔거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