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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Oct 18. 2018

김훈을 따라 하던 애송이

김훈만 읽던 시절이 있었고, 그의 단문을 흉내 내던 내가 있었다.

  김훈만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주어와 동사의 조합만으로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토록 마초라니. 그의 어떤 책의 어떤 부분과 만나면 나는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앞으로 넘어갈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그의 ‘개별성(독자성)’과 ‘전체성(통일성)’ 담론은 번번이 나와 세계를 돌아보게 했다.

그의 글과 처음 만난 날, 내가 작가들의 작가라는 그의 별칭이 더 이상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의 글은 읽는 순간 바로 느껴지는 뭔가가 있었다. 초면에 몇 마디의 말로 상대를 거뜬히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가진 기질은 둘 중 하나다.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어떤 개소리를 해도 턱 상대방의 말문을 막히게 하거나, 짬밥에서 우러나오는 송곳 같은 말씀으로 상대가 잔말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후자였다. 물론 젊은 시절에는 꽤 잘생기기도 했지만.

학교 과제부터, 일기, 편지에 이르기까지 한때 나는 김훈의 문투를 흉내 내면서 살았다. 읽는 이는 내 같잖은 단문에 얼마나 소스라쳤을까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이 새끼는 대체 뭐하는 새끼인지 궁금해했을 테니까.

  한때는 내 전부와 같이 느껴져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흉내 내고 닮아가려고 애쓰던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몹쓸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그 대상은 계속 변천했다. 보통 2년 정도의 주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낙장불입이라고 했던가. 주변 사람들에게 침 튀기며 뱉어낸 나를 온통 차지했던 그것들, 지금은 자연스레 멀어지거나 심지어 싫어져 버린 그것들이 불쑥 튀어나와 나의 아름다운 현재를 못살게 군다. 아! 방법이 없을까. 왜 우리 인생에는 취소 버튼이 없는 걸까. 모조리 취소하고 싶다. 다 취소해버리고 싶다.

     과거에 내뱉은 말에 얽매이지 말고 꿋꿋이 현재를 살아가라며 큰소리치는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은 아마도 취소하고 싶은 과거가 많은 사람이었을 거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법이니까.



김훈 선생님과 함께(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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