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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Oct 17. 2018

이모는 떠나며 노무현과 유재하를 남겼다.

다시 못 올 지난날을 난 꾸밈 없이 영원히 간직하리.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나는 그날도 늦잠을 잤다. 스무 살의 나는 기회를 만들어 술을 퍼마시는 일이 잦았는데, 그날의 나는 전날의 만취가 만들어 낸 숙취로 늦게까지 잠을 잤던 것이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간신히 침대에서 기어 나와 거실로 나오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모네 식구들이 미국으로 이민 가던 날에도 나는 기어코 늦잠을 자고야 말았다. 미안한 마음에 전화라도 걸려다가 말고 일단 정신을 차리려고 물을 한 컵 마시며 TV를 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까 들었다 놓은 전화기를 다시 들었다.
“이모, 뉴스 봤어?”
“봤지, 어쩌냐. 이모 이제 곧 간다.”
 이모와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나니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숙취에 쩔어 한심하게 소파에 앉아있는 내 모습, 더구나 갑자기 내가 알던 두 사람을 동시에 저 멀리 떠나보내는 기분이란 참 뭐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이모가 선물로 주고 간 몇십장의 음악 CD가 가득 담긴 커다란 쇼핑백을 풀어헤쳤다. 김현식, 윤종신, 이승환, 김건모 등의 한국 가요 앨범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날 나는 유재하의 1집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와 처음 만났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한국 가요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이란다. 기분도 꿀꿀한데, 명반이라고 난리들이니 한번 들어나 보자는 심산으로 앨범을 플레이했다. 내 방 불을 끄고 드러누워 눈을 감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이모가 탄 비행기와 미국을 떠올리며 유재하의 1집 앨범을 들었다. 생각이 많았던 탓인지 순식간에 앨범은 마지막 트랙까지의 달리기를 마쳤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명반이라더니 솔직히 대단한 감동은 없었다. 맹맹한 음식을 어떻게든 다 먹고 난 후의 밍밍한 기분이었달까.

이후, 나는 사람들이 환장하며 칭송하는 천재 가수의 명반에 함께 감동하기 위해 틈만 나면 앨범을 플레이했다. 마치 평양냉면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자칭 미식가들의 호들갑에 못 이겨 그것을 며칠 연속으로 잡수러 가는 호갱님들처럼. 수차례의 억지 감상 끝에 나는 나의 인색한 감동 능력에 끝내 굴복했다. 그리고 본래 내가 즐겨 듣던 블랙 뮤직에 다시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던 같은 해 끝자락의 어느 날, 나는 또 술을 잔뜩 처먹었다. 그렇게 취기를 가득 품고 강남역에서 올라탄 인천행 광역버스의 라디오 속에서 흘러나오는 유재하의 ‘지난 날’을 듣다가 나는 뜨거운 감동에 까무러칠 뻔했다. 그 어떤 감흥도 일지 않아 날 민망하게 만들던 유재하의 목소리가 미친 듯이 나의 마음을 후벼댔다. 그의 목소리 속에서 나는 노무현 대통령과 이모를 보고 들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죽은 그의 영혼과 마주했던 것일까. 가끔 나는 맨정신이 아닌 상태의 내가 되어 익숙한 것들과의 재회를 꿈꾼다. 에이, 뭐, 대마초나 마약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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