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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May 06. 2019

정말 <위대한 개츠비>가 동성애 문학입니까?

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어딘가에는 있습니다.

[알림]

* 스포일링이 될 수 있습니다.

* 모든 소설 인용은 김석희 님이 번역하고 열림원에서 출판한 <위대한 개츠비> 초판 9쇄(2016)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모든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가능성의 문을 열고 있다. 따라서 문학 읽기라는 것도 일방통행 도로의 운행처럼 한 방향으로만 재미없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독자의 머릿속을 드나들며 소통하는 일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문학 텍스트 해석의 절대적 기준을 엄격히 세워두고 그것을 토대로 점수를 매기는 우리나라 중등학교 문학 수업을 조금은 웃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학 수업 속에서 우리는 그저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다른 입장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스눕피의 피츠제럴드 잡설, 그 두 번째 이야기는 호모 섹슈얼의 시각으로 본 소설 <위대한 개츠비>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1장을 대충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책의 제목을 제공한 '제이 개츠비'라는 인물이 아닌 그와 지척에 살고 있는 '닉 캐러웨이'라는 남성의 입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 '나'로 대변되는 1인칭 화자인데, 학창 시절부터 세상사 모든 판단을 유보하며 살아와서 그런지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으로 이 세상을 꼼꼼하게 뜯어보며 깊이 생각하는 인물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게이 코드로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이 소설 속 화자 '닉 캐러웨이'가 사실은 남자를 좋아하는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라는 주장과 함께 시작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버트 래드포드가 주연한 1974년작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첫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였다. 하지만 트루먼 카포티의 시나리오는 채택되지 못하고 버려졌다. 대신 영화 <대부 The Godfather>의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트루먼 카포티의 바통을 이어받아 시나리오를 완성시켰다. 트루먼 카포티의 시나리오가 채택되지 못한 이유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트루먼 카포티가 당시 늘 술에 절어있어서 제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 그의 시나리오가 너무 길고 내용 면에서 다채롭지 못했다는 것, 데이지와 개츠비의 과거 이야기가 부족했다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그의 시나리오에는 아주 흥미로운(?) 결격 사유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트루먼 카포티가 소설 속 화자 '닉 캐러웨이'를 '게이'로, '조던 베이커'를 '레즈비언'으로 그렸다는 점이다(피츠제럴드가 소설을 써 내려가면서 캐릭터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흘린 불분명한 힌트를 훌륭한 이야기꾼이자 잘 알려진 동성애자 트루먼 카포티가 날름 주워서 보다 분명하게 각색하여 보여준 것일까? 잘 알려진 대로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동성애자였다).




트루먼 카포티의 <위대한 개츠비> 시나리오 초고의 일부



영화 위대한 개츠비(1974)의 한 장면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작가 피츠제럴드의 개인적 삶을 다룬 전기적 성격을 띠는 책이나 <위대한 개츠비>를 자세히 뜯어보며 분석하는 류의 책까지도 재미있다고 실실 대며 즐기는 보기에 따라서는 꽤나 한심하고 영양가 없는 종류의 사람이다. 또 <위대한 개츠비>를 하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 보니 텍스트를 따라가는 내 눈과 입이 소설을 구성하는 어떤 특정 리듬을 완전히 이해해서 정말로 물 흐르듯 페이지를 훅훅 넘기는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 쓸모없는 경험과 능력을 어디에다가 쓸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내게도 매번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특정 구간이 존재한다. 그 구간과 마주하면 나는 해당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게 되고, 뭔가 물 흐르듯 읽어 내려가던 독서의 흐름이 툭 끊겨버리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바로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를 '게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며 여러 텍스트를 통해 공개된 바 있는 장면들과 만나게 될 때이다.


그림이든 영화든 책이든 음악이든 작가가 몰래 숨겨놓은 비밀스러운 장치를 한번 '스포'당하게 되면 두 번 다시 이전과 같은 감상을 할 수 없다. 그것은 슬픈 일이다(흔히들 말하듯 안 본 눈이나 안 들은귀를 사는 방법이 있지만, 사람 눈이나 귀를 사는 일의 수고로움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나온 말이지만, 소설 <위대한 개츠비> 속 이런 문장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적응력을 쏟아부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서글픈 일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 어떤 부분이 ‘닉 캐러웨이’를 ‘게이’라고 의심하게 만드는 걸까? 지금부터 나의 개인적 견해를 얹어서 '닉 캐러웨이'를 '게이'로 보는 어떤 시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먼저 <위대한 개츠비> 2장의 다음과 같은 장면을 살펴보자.



아래층 아파트에 사는 매키 씨는 얼굴이 창백하고 여자 같은 남자였다. 광대뼈에 하얀 비누거품이 한 점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면도를 한 모양이었다. (중략) 그의 아내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 보이고, 용모는 단정하지만 왠지 불쾌한 여자였다. (중략) 아홉 시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열 시가 되어 있었다. 매키 씨는 어느 활동가의 사진처럼 움켜쥔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의자에 앉아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오후 내내 나를 괴롭힌 말라붙은 비누거품을 그의 뺨에서 닦아주었다.



한편 소파 위에서는 절망에 빠진 머틀이 피를 계속 흘리면서도, 베르사유 궁전의 풍경이 수놓아진 융단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 위에 <타운 태틀>지를 펼쳐놓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때 매키 씨가 다시 몸을 돌려 문 밖으로 곧장 걸어 나갔다. 나도 샹들리에에 걸려 있는 모자를 들고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언제 점심이나 하러 오세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그가 말했다.

"어디로요?"

"어디서든지."

"손잡이에서 손을 떼세요." 엘리베이터 보이가 소리쳤다.

"미안하네." 매키 씨가 점잖게 말했다. "거기에 손이 닿은 줄 몰랐지."

"좋습니다. 기꺼이 가지요." 나는 그의 초대에 응했다.

ㆍㆍㆍㆍㆍㆍ나는 그의 침대 옆에 서 있었고, 그는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앉아 두 손에 커다란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미녀와 야수ㆍㆍㆍㆍㆍㆍ 고독ㆍㆍㆍㆍㆍㆍ 식료품 가게의 늙은 말ㆍㆍㆍㆍㆍㆍ 브루클린 다리ㆍㆍㆍㆍㆍㆍ."

어느 틈엔가 나는 펜실베이니아 역의 차가운 지하 대합실에 반쯤 졸며 누운 채 조간신문 <트리뷴>을 보면서 네 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 2장 중에서



2장에서 주인공 닉 캐러웨이는 일요일 오후 그의 예일 대학 동창이자 육촌 여동생 데이지의 남편 톰 뷰캐넌(점심때부터 마신 술에 취해 있었다)과 함께 뉴욕으로 가는 길에 반강제적으로 (톰으로부터) 끌어내려져 톰의 정부 머틀 윌슨과 만나게 된다. 이후, 셋은 뉴욕 158번가 톰과 머틀의 아파트 꼭대기 층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닉 캐러웨이는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사진작가 '매키'와 그의 부인 등과 만나 '위스키'를 마시며 논다. 닉 캐러웨이는 2장의 어떤 문장을 통해 자신은 평생 딱 두 번 술에 취했는데, 그날 오후가 바로 그 두 번 중 한 번이라고 밝히기도 한다.

위 장면은 자정 무렵, 톰이 그의 정부 머틀이 톰의 부인 '데이지'의 이름을 들먹이는 일에 대해 언쟁을 벌이다가 결국 머틀의 코를 후려갈겨 머틀이 코피를 흘리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는데, 그 혼란의 틈 속에서 자리를 뜨는 예쁘장하고 창백한 사진작가 매키를 따라가는 닉 캐러웨이와 그 이후의 행적을 보여준다.


위 장면에서 제기되는 닉 캐러웨이 게이 추측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닉 캐러웨이가 '예쁘장하고 창백한' 사진작가 매키를 만나자마자 그의 광대뼈에 묻은 비누거품을 체크하고 그것이 거슬려 계속 생각하고 있다가는 그가 술에 취해 잠든 틈을 타서 그것을 닦아내는 장면은 닉이 매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것, 둘째, 톰이 머틀의 코를 후려갈겨 피를 흘리는 혼란의 상황 속에서 조용히 집 밖으로 빠져나가는 매키를 따라 닉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 매키가 보여주는 이상 행동(마치 '라면 먹고 갈래?'의 뉘앙스로 닉에게 점심 한 끼를 권하면서 남근의 모양을 한 엘리베이터 레버를 만지고 엘리베이터 보이에게 실수라고 이야기하는 일)이 속된 말로 매키가 끼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베이터 레버를 조작하기 위해 그 앞에 붙어 서 있는 당시의 엘리베이터 보이와 탑승객의 관계를 생각하면 엘리베이터 레버를 만지는 행위가 실수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을뿐더러 엘리베이터 보이 바로 옆에 붙어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동작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갑자기 화면이 바뀌고 매키의 집으로 들어간 닉이 뜬금없이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매키 옆에 서 있었다는 것, 그리고 또 한 번 화면이 바뀌고 펜실베이니아 역의 지하 대합실에서 새벽 4시 기차를 기다리는 닉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두세 시간의 행적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과연 매키와 닉은 속옷 바람으로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물론, 나는 위와 같은 해석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다. 앞서 밝혔듯 자유로운 접근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은 문학을 읽는 즐거움인 것이다. 어쨌든 내 생각은 그렇다. 닉은 2장의 어떤 문장을 통해 이 날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술에 취했던 이틀 중 하루로 꼽았을 정도로 술에 잔뜩 취해있었고, 그것은 종일 함께 위스키를 마신 사진작가 매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매키는 술에 취하면 귀가 본능이 발동하는 종류의 남성이고(주변을 둘러보면 무지 많다), 혼란의 뒤처리를 자신의 부인에게 맡겨두고 본인의 집(아래층)으로 가기 위해 그들의 방을 몰래 빠져나간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술에 취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집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세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이기에 그는 술에 취해 옷을 벗어던지고 침대에 앉아 닉에게 자신의 사진 포트폴리오를 자랑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닉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사실 닉은 일요일 오후에 별로 할 일도 없을 것이란 톰의 어림짐작으로 기분 나쁘게 억지로 톰에게 끌려 온 처지이고, 애초에 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톰과 그의 정부 머틀에게 한 차례 사양의 뜻을 밝혔지만, 그들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또한 그렇게 억지로 끌려간 술자리 속에서도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고 싶어 하지만, 그때마다 어떤 논쟁에 휘말려 자리에 붙들렸다고 말하면서 닉은 자꾸 '바깥'을 생각하고 있다. 즉, 그는 튀어나갈 타이밍을 찾고 있었고, 매키의 주옥같은 탈출 타이밍에 얹혀 급하게 밖으로 빠져나간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다.

하지만 닉 캐러웨이의 게이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작가 피츠제럴드가 구태여 소설의 초장에 쓸데없이 위와 같은 장면을 집어넣어 지면을 낭비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한마디로 작가가 대놓고 노렸다는 주장인 것인데, 솔직히 말해 답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 계신 피츠제럴드 선생님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문제의 엘리베이터 레버 (출처: 좌-New York Times / 우- A Year in New York)



객차의 밀짚 좌석은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것 같았다. 내 옆에 앉은 여자는 한동안 하얀 블라우스 속으로 묘하게 바람을 불어넣어 땀을 식히고 있다가, 손에 쥔 신문지가 땀에 젖어버리자 자포자기한 듯 처량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뜨거운 열기 속에 푸석 쓰러졌다. 그 바람에 그녀의 지갑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머, 내 지갑!" 그녀가 헐떡거리며 외쳤다.

나는 지친 몸으로 허리를 굽혀서 지갑을 집어 든 뒤,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지갑의 한쪽 끝을 잡고 팔을 쭉 뻗어서 건네주었다. 그런데도 그 여자를 포함하여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위대한 개츠비> 7장 중에서



<위대한 개츠비> 7장은 극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구간이다. 닉, 개츠비, 조던 그리고 데이지와 톰은 데이지 부부의 집 안에 모이고, 덥다고 유난을 떨며 시내로 나가자는 데이지의 성화에 그들은 차 두 대를 나눠 타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 도착한 그들은 고민 끝에 플라자 호텔의 특별실을 하나 빌리는 이상한 짓을 자행한다(처음에는 데이지가 욕실 다섯 개를 빌려 냉수욕을 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에 촉발된 사건이었지만, 결국 함께 모여 박하술을 마실 수 있는 곳으로써 플라자 호텔 대실 아이디어가 확정된다.) 그날은 그해 들어 가장 더운 여름날이었다.



(출처: Pinterest)


예부터 Purse나 Rose와 같은 단어들은 여성의 성기를 비유했다. 구글링을 조금만 해보면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까지 그 비유의 시기가 거슬러 올라가는 걸 확인할 수 있다(구체적으로 찾아보진 않았지만, 그 이전에도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7장에서 닉 캐러웨이는 열차 안에서 옆자리의 여자가 바닥에 떨어뜨린 지갑의 한쪽 끝을 잡고 그녀에게 건네준다.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지만(지갑의 한쪽 끝을 잡고), 사람들은 여전히 닉을 의심한다. 즉, 여성의 성기를 비유하는 지갑의 한쪽 끝을 잡고 마치 자기는 그것에 아무런 관심 없고 심지어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라는 듯(위 대목을 읽어 보면 그런 뉘앙스가 풍기긴 한다) 건네주는 모습은 '여성'에 관심이 없는 닉 캐러웨이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어떤 말이든 할 수야 있겠지만, 단지 하나의 '상징'을 대하는 태도를 매개로 무려 성 정체성을 추측하려는 시도는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심지어 그 상징의 개념이 명확히 매칭되는 것도 아니다).


이밖에 닉 캐러웨이의 '게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정말로 다양하고 자잘하기에 그것들을 일일이 다 찾아 소개하면 글이 정말로 난잡해질 것 같다. 따라서 여기서 멈춰볼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에 대략적으로 그것들 중의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츠비의 사업 파트너 '마이어 울프심'이 개츠비와 닉 앞에서 친구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장소 '뉴욕 메트로폴 호텔'은 당시 게이들의 성지였다는 이야기, 소설의 주무대 웨스트 에그와 이스트 에그가 남성의 고환을 상징한다는 것, 개츠비가 입는 핑크 슈트의 상징성, 소설 속 시대 배경인 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젊은이들이 군생활을 통해 성 정체성을 찾게 된 경우가 많았다는 역사적 근거, 닉 캐러웨이가 조던 베이커, 톰 뷰캐넌, 제이 개츠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각각의 문장 속에 드러나는 표현 방식의 뚜렷한 차이 정도가 두드러지는 근거 자료이다. 누가 봐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언제 한번 이와 관련하여 2탄을 준비해볼까도 생각중이다.


사실 닉 캐러웨이가 동성애자이든 이성애자이든 사실 그의 성 정체성이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매력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정체성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이 소설의 신비로운 매력은 더 강화된다고 생각한다. 닉 캐러웨이는 그저 섬세한 관찰력과 속 깊은 생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소설의 주인공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바라보는 다양한 접근은 언제나 흥미롭고 바람직하다. 열린 마음과 다양한 생각이 더해질 때 하나의 소설은 더 가치 있는 논의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팬들은 ‘이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라고 이야기한다. 펼칠 때마다 책이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이 책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책이 결코 쉽게 쓰이지 않았다는 거다. 혹시나 아직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경고하건대 작가 피츠제럴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저런 장면을 집어넣었는지를 상상하면서 책을 읽지 마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왜냐하면 그렇게 책을 읽으면 페이지 한 장을 넘기는 것도 너무 힘든 일이 될 테니까. 뻥 아니라 진짜!





[참고]


- Edward Wasiolek

<Sexual Drama of Nick and Gatsby>(University of Chicago, 1992)


- Bill Danielsson

We Need to Talk About Nick: Sexual Divergence, Characterization and the Hardcover Closet in F. Scott Fitzgerald’s The Great Gatsby(2017)


- Monty Heying

Gatsby: Gay Implications in Nick Carraway(2014)


https://www.theatlantic.com/entertainment/archive/2013/05/-i-the-great-gatsby-i-movie-needed-to-be-more-gay/275768/

https://variety.com/2013/biz/features/in-search-of-a-great-gatsby-hollywoods-f-scott-fitz-and-starts-1200386084/

https://themillions.com/2018/04/the-queering-of-nick-carrawa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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