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 선생님이 뭐 괜히 집어넣었겠어요?
[알림]
* 스포일링이 될 수 있습니다.
* 모든 소설 인용은 김석희 님이 번역하고 열림원에서 출판한 <위대한 개츠비> 초판 9쇄(2016)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스눕피의 피츠제럴드 잡설>, 몇 개월만의 업데이트입니다. "써야지, 써야지!" 벼르고는 있었는데 이래저래 품이 많이 든다는 "핑계, 핑계!"를 대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오늘에야 세 번째 편을 완성하여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뭐 바로 시작하죠.
스눕피의 피츠제럴드 잡설, 그 세 번째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 속에 등장하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게 오래된 소설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는 당대의 시대적 배경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당대의 '음악'은 늘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피츠제럴드는 그의 작품 안에 음악적 요소를 집어넣어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선구적인 작가였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 오스틴 그레이엄이 쓴 <The Literary Soundtrack: Or, F. Scott Fitzgerald's Heard and Unheard Melodies>라는 논문은 피츠제럴드의 음악적 글쓰기의 특징적인 면모에 대해 개괄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저작입니다. 그는 해당 논문을 통해 피츠제럴드를 'Musical Writing음악적 글쓰기'의 'Innovator혁신가'라고 칭합니다. 피츠제럴드는 사운드 레코딩 시스템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음악이 손에 잡힐 듯 보편적으로 확대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란 1세대 문학가였고,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측면에서의 음악이 중요성을 더해가던 시기와 맞물려 활동하던 작가였습니다. 더욱이 그와 그의 아내 젤다가 흠모하던 도시 '뉴욕'은 미국의 음악 제작과 활동을 대표하던 미국 음악의 수도이기도 했으니 시대와 환경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오늘은 1920년대 미국의 시대적 배경을 확인해볼 수 있는 정보로서 또 소설의 디테일을 최대한으로 살려주고 주제를 보다 분명하게 해주는 수단으로서 피츠제럴드가 소설 <위대한 개츠비> 속에 녹여낸 실제 노래들을 쭉 정리해서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피츠제럴드는 '블라디미르 토스토프'의 <세계 재즈의 역사>라는 가상의 노래를 포함한 몇 곡을 소설 <위대한 개츠비> 속에 자연스럽게 배치해놓았는데요, 단순히 해당 노래들에 대한 정보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공교육으로부터 착실히 배운 바 있는 지독한 의미 부여의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약간의 해설도 덧붙여 보겠습니다. 곡 소개의 순서는 소설 속 음악의 등장 순서와 동일합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노래는 <The Sheik of Araby아라비아의 족장>입니다. <The Sheik of Araby>는 소설의 제4장에서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가 플라자 호텔 커피숍에서 조던 베이커로부터 데이지와 개츠비에 대한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호텔을 빠져나와 사륜마차를 타고 센트럴파크를 지나는 중에 풀밭에 모여있는 아이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라는 설정으로 등장합니다.
조던 베이커가 이야기를 끝낸 것은 우리가 플라자 호텔을 떠난 지 30분 뒤였다.
그때 우리는 빅토리아를 타고 센트럴파크를 지나고 있었다.
태양은 영화배우들이 많이 사는 웨스트 50번가의 고층 아파트 뒤로 사라져 버렸고,
벌써 풀밭에 귀뚜라미처럼 모여 있는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황혼으로 물든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I'm the Sheik of Araby,
나는 아라비아의 족장
Your love belongs to me.
그대의 사랑은 나의 것
At night when you're asleep
그대가 잠든 한밤중에
Into your tent I'll creep.
그대의 천막으로 기어들리라
"묘한 우연이군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절대 우연이 아니었어요."
"왜요?"
"개츠비가 그 집을 산 것은, 데이지가 살고 있는 곳이
만 건너편이 되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으니까요."
P.123-124_제4장
<The Sheik of Araby>는 1921년에 미국에서 공개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재즈곡입니다. 'Araby'가 의미하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서아시아의 아라비아 반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재즈의 본고장 루이지애나주의 Araby라는 지역을 동시에 가리키기도 합니다. 가사의 내용을 한 번 보실까요.
'나는 아라비아의 족장
그대의 사랑은 나의 것
그대가 잠든 한밤중에
그대의 천막으로 기어들리라.'
데이지를 다시 내 여자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제이 개츠비의 일편단심과 굳은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Araby와 Gatsby 사이의 언어적 유사성을 한 번 보세요. 놀랍습니다. by자 돌림이잖아요. 마치 광식이 동생 광태처럼요. 저기 저 닉 캐러웨이의 말마따나 '묘한 우연'입니다.
예술 작품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영향의 무게는 어마어마합니다. '글' 하나로 승부를 보는 책(소설)은 그나마 덜한 편이라고는 해도 음악 설정이 시사하는 바를 놓치고 넘어가면 작가의 친절한 도움닫기 설정을 쌩까고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음악을 아끼고 사랑하던 작가 피츠제럴드의 소설에서라면 더욱더 주의를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으로 소개할 두 곡은 <Love Nest사랑의 보금자리>와 <Ain't We Got Fun우리는 즐거웠잖아?>입니다. 이 두 곡은 소설의 제5장에서 약 5년 만에 재회한 개츠비와 데이지가 개츠비의 집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개츠비 맨션의 '하숙생'으로 불리는 클립스프링어에게 개츠비가 피아노 연주를 부탁하면서 공개됩니다.
클립스프링어는 <사랑의 보금자리>를 연주한 뒤,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돌려 당황한 표정으로 어둠 속의 개츠비를 찾았다.
"보시다시피 연습을 전혀 못했어요.
그래서 못 친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연습을 통......"
"말이 많군. 어서 치게!" 개츠비가 명령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우리는 즐거웠잖아......
(중략)
한 가지는 확실해. 그보다 더 확실한 건 없어.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뱅이에게는 자식들만 생기지
그러는 동안에도
그러는 사이에도......
P.149-150_제5장
클립스프링어가 처음으로 연주하는 곡으로 설정된 <The Love Nest>는 1920년에 초연하여 큰 인기를 끈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담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Mary'의 주제곡입니다.
부동산(이동 주택 건설)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공 Jack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된 Jack의 어머니 Keene의 비서 Mary,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 주변을 돌보지 못하던 주인공 Jack, 그는 결국 그가 사들인 캔자스 땅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막대한 부를 얻고 고향 Long Island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제야 Jack은 어머니의 비서 Mary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뮤지컬의 주제는 꽤 분명하고, 주제곡 <The Love Nest>의 테마 역시 선명합니다(이 곡의 테마와 소설의 연결점은 바로 뒤에서 설명을 드릴게요). 그것은 개츠비와 데이지의 관계에 그대로 대입이 가능하죠. 피츠제럴드 선생님의 기가 막힌 음악 선곡에 무릎을 몇 번씩이나 치고 갑니다.
Many builders there have been
건물을 짓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죠.
Since the world began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Palace, cottage, mansion, Inn,
궁전, 오두막, 맨션, 호텔까지
They have built for man
모두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죠.
Some were small, and some were tall
어떤 것들은 작고, 또 어떤 것들은 컸죠.
Long or wide or low.
길기도 넓기도 낮기도 했어요.
But the best one of them all
하지만 그중 최고는
Jack built long ago
잭이 오래전에 지은 거죠.
'Twas build in bygone days
지난날에 지어졌어요.
Yet millions sing it praise.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했죠.
Just a love nest
그저 사랑의 보금자리
Cozy and warm
아늑하고 따뜻한
Like a dove rest
비둘기 둥지처럼 말이에요.
Down on a farm
농장 아래 자리 잡은
<The Love Nest사랑의 보금자리>
클립스프링어가 <The Love Nest>를 연주하고 이어 들려주는 노래 <Ain't We Got Fun>은 1920년에 처음으로 발표되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사교댄스 'Fox-trot폭스트롯' 장르에 속하는 곡인 동시에 소위 '광란의 20년대'라고 부르는 시기를 대표하는 노래였습니다.
<Ain't We Got Fun>이 발표되어 커다란 인기를 끈 1920년부터 1921년 사이에 미국은 심각한 경제 불황과 격변을 맞았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됐고, 실업자는 넘쳐났으며, 농업이 무너졌고, 은행이 연이어 도산했습니다. 즉, <Ain't We Got Fun>은 힘들고 어려운 침체의 시기에 노래 제목과 그 가사처럼 유머와 자조 섞인 웃음으로 현실을 박살 내 보려는 풍자의 형식을 띠고 있는 노래였습니다.
부연하자면 1920년대의 미국은 그야말로 '광란'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1920년과 1921년의 침체기 그리고 29년 이후의 대공황기를 제외한다면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모하며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국가가 되었습니다. 자동차, 전기, 건설 사업이 발전하면서 기업들은 미친듯한 성장을 매해 거듭했으며 라디오와 TV 그리고 영화가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근로 시간이 단축되었고 이로 인해 여가에 대한 관심 또한 증가했습니다. 섹스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신여성과 신남성이 등장하기도 했죠.
하지만 많은 국민이 '알 수 없는 불안'이라는 감정과 싸워야만 했습니다(전쟁 직후의 집단적 히스테리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요즘의 YOLO와와 같은 가치관이 나타나기도 했어요). 또한 금주법이 발효되었고(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시대적 배경 중 하나이죠, 청교도적인 가치에 근거해서 술과 관계된 모든 것을 청산하기 위한 국가적 조처였으나, 늘 그렇듯 이러한 절대적 금지법은 음지 시장의 불법 거래와 유통을 활성화할 뿐이었습니다), 거리에선 KKK를 위시로 한 갱단이 무자비하게 설치며 국가적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Every morning, every evening
아침에도, 저녁에도
Ain't we got fun?
우리는 즐거웠잖아?
Not much money, Oh, but honey
넉넉하진 않아도
Ain't we got fun?
우린 즐거웠잖아?
There's nothing surer,
한 가지는 확실해, 그보다 더 확실한 건 없어.
The rich get richer and the poor get children.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뱅이에게는 자식들만 생기지
In the meantime,
그러는 동안에도
In between time,
그러는 사이에도
Ain't we got fun!"
우리는 즐거웠잖아!
<Ain't We Got Fun>
데이지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오로지 데이지만을 생각하며 불법적인 경로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마치 만국박람회를 연상케 하는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대저택을 마련한 제이 개츠비, 하지만 데이지의 남편은 이미 동세대 사이에서 비교를 불허하는 어마어마한 부를 지닌 인물이자, 개츠비가 그 많은 '돈'으로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현실의 커다란 벽 너머에 굳건히 서서 자기의 신성한 영토를 방어하며 으르렁대는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의 기득권의 아이콘 톰 뷰캐넌입니다. 데이지와 톰 사이의 결혼 생활은 로맨스가 결여되어 생기를 잃은 모습이고(서로를 못 견뎌하는), 이리저리 어긋나 삐걱거리지만, 그들 사이에는 5살짜리 '딸'이 있고, 결혼 '생활'로 이어진 '기억'이 있습니다. 개츠비의 완벽한 오판이었죠. 사랑은 타이밍입니다. 사람 관계에 있어 때를 놓친다는 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니까요.
이 세상엔 크고 멋진 빌딩들이 많지만 비둘기 둥지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사랑의 보금자리가 으뜸이며(The Love Nest), 그리 넉넉하진 않아도 즐거웠던 과거의 우리는(Ain't We Got Fun) 다신 되돌릴 수 없는 아픈 관계의 역사로 남게 될 뿐인 것이죠. 다시 되돌릴 수 없기에 애틋하고 슬픈 우리들의 지난날 말입니다.
데이지가 닉과 함께 개츠비의 대저택 내부를 구경하다가 개츠비의 다종 다양하고 화려한 셔츠 더미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장면을 기억하시는지요? 데이지가 흘렸던 눈물과 신음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결국 어긋난 타이밍의 슬픈 곡소리이자 신분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 애를 쓰는 개츠비 그리고 절대 개츠비에게 돌아갈 일 따위는 없음을 누구보다 잘 자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향한 지극한 동정의 눈물이었겠죠. 데이지와 개츠비, 이 둘은 모두 재현할 수 없는 과거의 자기 자신과 지난날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지만, 솔직히 데이지에게는 답이 정해져 있었다고 봅니다.
그녀의 눈길은 나를 떠나 불이 켜진 계단 꼭대기를 더듬었다.
열린 문으로는 그해에 유행한 산뜻하고 슬픈 왈츠곡 <새벽 세 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국 개츠비의 파티에는 격식이 없다는 것, 바로 거기에 그녀의 세계에는 전혀 없는 낭만적 가능성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들려오는 그 노래의 무언가가 그녀를 다시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속을 헤아릴 수 없는 이 어두운 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누군가 뜻밖의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
모두 깜짝 놀랄 만큼 귀한 사람, 눈부시게 빛나는 젊은 아가씨가 도착할지도 모른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듯한 만남의 순간, 그녀가 개츠비에게 던진 단 한 번의 눈길로,
그동안 흔들림 없이 한 자에게만 마음을 바쳤던 지난 5년의 세월이 말끔히 지워져 버릴지 모른다.
P.170-171_제6장
It's three o'clock in the morning
지금은 새벽 세 시
We've danced the whole night through
우린 밤새 춤을 추었죠
And daylight soon will be dawning
해는 곧 떠오를 거고
Just one more waltz with you
당신과 함께 왈츠 한 곡만 더
That melody so entrancing
황홀한 그 멜로디
Seems to be made for us two
우리 둘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요
I could just keep on dancing forever dear with you
당신과 함께라면 영원히 춤을 출 수도 있어요
<Three o'clock in the morning>
네 번째로 소개할 노래 <Three o'clock in the morning새벽 세 시>은 소설의 제6장에서 톰 뷰캐넌과 데이지 뷰캐넌 부부가 함께 개츠비의 토요일 파티에 참석한 날, 집으로 돌아갈 자동차를 기다리면서 '개츠비'의 정체를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데이지의 시선이 꽂힌 불이 켜진 계단 꼭대기, 열린 문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곡이라는 설정으로 등장합니다(소설의 제5장에서 이미 데이지와 개츠비는 약 5년 만에 재회를 하고, 닉과 데이지는 개츠비의 대저택을 구경하고 난 이후입니다). 노래는 1918년 솔로 피아노곡으로 탄생하여, 1921년에 가사가 붙고, 폴 화이트먼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대히트를 기록한 1920년대를 대표하는 왈츠곡 중 하나입니다.
<Three o'clock in the morning>이 등장하는 6장, 톰과 함께 개츠비의 파티에 참석한 데이지가 느낀 감정의 핵심은 분명 불편함과 불안함이라는 키워드 위에 강하게 내리 꽂힙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난잡하게 싸돌아다니고 신흥 졸부들이 판치는 웨스트에그의 어떤 불안한 가벼움을 그녀는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5년 만에 돌연, 불쑥 자기 인생의 본진으로 깊숙이 쳐들어와 마음을 휘저어놓은 진심으로 사랑했던 개츠비,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추억은 짐승 같이 투박한, 정부가 있는 무심한 남편과의 로맨스가 결여된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데이지의 꺼져가던 욕망의 불꽃을 다시 불태우게 되죠. 이러한 복잡 미묘한 데이지의 귀에 들어온 노래 <Three o'clock in the morning>의 가사를 한 번 보세요. 아, 그녀의 감정이 어땠을지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되는군요.
그게 당신의 고상한 말버릇이오?" 톰이 날카롭게 말했다.
"뭐가요?"
"그 '형씨'라는 호칭 말이오. 그건 대체 어디서 주워들은 거요?"
"나 좀 봐요. 톰." 데이지가 거울에서 돌아서면서 말했다.
"당신이 그런 인신공격이나 할 작정이라면 나는 1분도 여기 머물지 않겠어요. 전화해서 박하술에 넣을 얼음이나 주문하세요."
톰이 수화기를 들자, 압축되어 있던 열기가 폭발하듯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아래층 무도장에서 흘러나오는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에 귀를 기울였다.
"이 더위에 결혼을 하다니!" 조던이 울적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나도 6월 중순에 결혼했는 걸." 데이지가 지난 일을 생각해냈다.
"6월에 루이빌에서!" 졸도한 사람도 있었어! 졸도한 게 누구였죠, 톰?"
"빌럭시." 톰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P.197_제7장
다섯 번째로 소개할 노래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입니다(워낙 유명한 노래라 부가 설명은 생략합니다). 해당 곡은 소설의 제7장에서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모여 ('더위'에 유난을 떨다가는) 결국 뉴욕 플라자 호텔의 특별실을 대실하고 날이 선 대화들을 나누던 중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라는 설정으로 등장합니다.
폭발 직전의 임계점에 다른 톰과 개츠비 그리고 데이지 사이의 불편한 공기를 뚫고 흐르는 <결혼 행진곡>, 하지만 별안간 등장하는 이 노래가 갖는 진정한 의미는 뒤이어 톰과 데이지가 나누는 시답잖은 대화에 놓여있습니다. 그들이 공식적으로 혼인 관계임을 다시금 환기하는 <결혼 행진곡> 그리고 그 결혼과 관련해 데이지와 톰 둘이서만 공유하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는 개츠비와 데이지가 떨어져 있던 약 5년이라는 시간의 정체(개츠비 본인은 '무'의 시간이라 믿고 있는)를 분명하게 해 주죠. 더욱이 같은 장에서 개츠비는 데이지와 톰의 '딸'을 보고 멘탈이 붕괴된 이후 시점이라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고요. 슬프고 괴로운 감정 속에서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억지로 들어야만 하는 행복한 노래의 가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전쟁에서 그는 뛰어난 공훈을 세웠다. 전선에 나가기 전에는 대위였지만,
아르곤 전투를 치른 뒤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사단의 기관총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휴전이 되자 그는 귀국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무슨 사무착오나 오해 때문에 영국 옥스포드로 보내졌다.
이때 그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데이지의 편지에 초조한 절망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귀국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주변의 압력을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그를 만나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고, 그럼으로써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데이지는 젊었고, 그녀의 인공적인 세계는 난초 향기와 더불어 유쾌하고 즐거운 속물근성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인생의 비애와 암시를 새로운 가락에 담아 그해의 유행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연상시켰다.
색소폰들이 밤새도록 <빌 스트리트 블루스>의 절망적인 가락을 구슬프게 연주하는 동안, 백 켤레의 금빛 은빛 무도화가 바닥을 스치며 반짝이는 먼지를 일으켰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다과 시간에는 언제나 달콤한 미열로 끊임없이 고동치는 방들이 있었고, 플로어에서는 생기에 넘치는 얼굴들이 구슬픈 호른 소리에 흩날리는 장미 꽃잎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P.233-234_제8장
여섯 번째로 소개할 곡은 W.C Handy가 1917년에 발표한 블루스 곡인 <Beale Street Blues>입니다. 노래 제목 속에 등장하는 Beale Street은 테네시 주 멤피스에 위치한 '블루스'의 성지와 같은 곳인데요, 노래가 만들어질 당시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 한 지역에 대한(당시에는 Beale Avenue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이 노래가 발표된 이후 Beale Street으로 바뀌게 됩니다) 비참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담아낸 곡입니다.
이 노래는 소설의 제8장에서 '제이 개츠비'라는 인물이 스스로 품어오던 꿈이 깨어지고 완전히 박살 났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고, 닉에게 일종의 자기 고백을 하는 장면 속에서 등장합니다.
'재물에 파묻혀 보호되는 청춘과 신비' 그리고 '새로 장만한 많은 옷들의 산뜻함'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을 벗어난 곳에서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은처럼 빛나는 데이지의 존재'를 순수한 마음으로 동경하던 무일푼 감상주의자이자 강한 집념의 외곬 장교 '개츠비'는 그만 '데이지'를 사랑하게 됩니다(사실은 '그만'이라는 부사가 포인트입니다).
전쟁에 참가해 귀국하지 않는 '개츠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데이지, 하지만 정작 그녀를 지배하는 건 '사랑'보다는 '주변의 압력'이었고, 무엇보다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안도감'과 '확신'을 줄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높은 계급, 많은 자본)에 대한 갈급함이었죠.
개츠비를 그리워하며 초조해하는 데이지의 인생을 휘감는 <Beale Street Blues>의 절망적인 색소폰 연주, 하지만 곧이어 그녀는 하루에 예닐곱 명의 남자를 만나고, 침대 옆 방바닥에서 대충 아무렇게 엎어져 잠을 자다가 '건전한 부피감'을 지닌 남자 톰에게 자신을 내맡기게 됩니다.
아무도 없어요. 사장님은 시카고에 가셨어요.
아무도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안에서 누군가가 휘파람으로 <로저리>를 음정도 맞지 않게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캐러웨이란 사람이 뵙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세요."
"시카고에 가 있는 사람을 데려올 순 없잖아요. 안 그래요?"
바로 그때 문 저쪽에서 "스텔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는 울프심의 목소리였다.
P.263_제9장
개츠비가 죽고 난 이후, 개츠비의 옆에 남은 건 결국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 혼자 뿐이었습니다. 개츠비 옆에 붙어 한몫 챙겨보려던 치들과 개츠비를 추앙하던 잔챙이들, 부러 초대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개츠비의 파티에 오고 가던 그 수많은 인물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죠.
오늘 마지막으로 소개하게 될 노래 <The Rosary>는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개츠비가 죽고 난 이후 닉이 개츠비를 위해 누구라도 데려오고 싶은 마음에 개츠비의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도박사 마이어 울프심이 있는 뉴욕 '스와스티카 지주회사' 사무실에 전화를 넣고, 편지를 쓰고(거절의 답장을 받고) 결국 장례식 당일, 뉴욕 사무실에 직접 찾아간 상황 속에서 등장합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유대인 여자 스텔라는 마이어 울프심을 찾는 닉의 요청에 '아무도 없어요. 사장님은 시카고에 가셨어요'라며 능청스러운 거짓 대답을 하지만, 닉은 사무실 안에서 누군가가 휘파람으로 <The Rosary>를 음정도 맞지 않게 부르는 것을 똑똑이 듣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마이어 울프심의 목소리가 들리죠. "스텔라!"
마이어 울프심은 근엄한 표정으로 나와 닉을 반기고, 그와 개츠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장례식 참석을 바라는 닉의 요구에 울프심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대고 거절하죠.
소설 속에서 '마이어 울프심'은 쉰 살의 유대인으로 그려지는데요, 1898년 로버트 캐머런 로저스가 작사하고 에설버트 네빈이 작곡한 가톨릭 노래인 <The Rosary>(가톨릭의 대표적인 성물인 묵주를 뜻한다)를 휘파람으로 부릅니다. 휘파람으로 가톨릭 음악을 따라 부르는 유대인! 어머니와 누이에게 소개하고 싶은 남자라며 개츠비를 향한 실답지 않은 말이나 뱉어내던 자칭 개츠비의 '절친한' 사업 동료이자 친구는 그의 죽음을 알고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휘파람이나 부르며 나잇값을 못 하는 쉰 살의 도박사 아저씨였던 것이죠, 이 기가 막힌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피츠제럴드는 마이어 울프심의 휘파람으로 연주되는 <The Rosary>를 소설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마이어 울프심을 위시로 한 허섭스레기들의 부도덕한 품성과 이중성 그리고 위선을 꼬집은 것이었겠죠.
"누구에게든, 죽은 뒤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우정을 보여주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죽은 뒤에는 모든 걸 가만히 내버려 두자는 게 나의 원칙이오."
마이어 울프심의 이 찰진 멘트를 보세요. 닉이 느꼈을 경멸의 감정이 제게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닉의 감정을 상상해보다가 갑자기 한국 영화 <타짜>의 등장인물 고광렬의 명대사가 생각났습니다. 아주 잘 들어맞더군요.
"곽철용 저 새끼는 아주 그 유명한 그, 뭐, 아주 뭐라 그럴까, 아주 유명한, 어...... 10, 10새끼?"
이상으로 <위대한 개츠비> 속에 숨은 노래 일곱 곡에 대한 스눕피의 대수롭지 않은 설명을 마칩니다. 힙합 음악을 들을 때에도, 소설을 읽을 때에도 표면이 아닌 이면에 집중해 파고들어가는 일 자체가 제게는 즐거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글을 즐겁게 또는 유익하게 읽을 리 만무하다는 걸 잘 압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감정을 공유하는 목적으로 브런치를 활용하고 있지만, 어떤 글은 그저 개인의 취향과 취미를 담아 차곡차곡 쌓아놓는 것을 목적으로 작성하고 있고, 이 글이 바로 후자에 해당이 되겠네요.
<스눕피의 피츠제럴드 잡설> 네 번째 이야기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프런트 이미지 출처: Red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