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아이돌에 관해 몇 글자 끄적거리다.

by 스눕피

1999년 즈음에 나는 부모님을 졸라 삼성 컴퓨터(매직 스테이션)를 샀던 걸로 기억하는데, 컴퓨터 안엔 어떤 의도로 누가 심어놓은 것인지 윤도현의 ‘너를 보내고’와 핑클의 ‘블루 레인’ 그리고 SES의 ‘너를 사랑해’가 들어 있었다. 윈도우즈 뮤직 플레이어로 핑클과 SES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행복한 기분에 젖곤 했다. 새 컴퓨터로 듣는 핑클과 SES 노래의 감칠맛은 남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핑클의 ‘블루 레인’을 들으며 만화 주제곡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 감성을 개박살낼 수 있었는데, 정작 그때의 나는 블루의 다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었다.

사실 핑클과 SES는 요즘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걸그룹 아이돌의 조상 격이다. 핑클과 SES는 이후 여자 아이돌, 걸그룹의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다. SES의 경우 유진의 예쁜 얼굴을 붙잡고 바다가, 핑클의 경우 성유리의 외모를 붙들고 옥주현이 감히 아이돌의 특수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는데, 이는 노래를 좀 부를 줄 안다면 얼굴은 평균에 조금 못 미쳐도 충분히 참작할 수 있다는 여자 아이돌 구성의 기본 원칙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돌아보면 그녀들은 유난히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바람에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정해진 안무를 행하고 카메라를 향해 구애의 눈빛을 보내느라 바빴다. 그러느라 그녀들은 어쩌자고 약 3분 30초를 다 허비하곤 했는데, 이러한 모습은 현재의 여자 아이돌에게서도 정확히 같은 양상으로 반복-재생되고 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체계화된 트레이닝을 통해 여자 아이돌의 노래와 춤 실력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는 것, 소녀들의 코 모양(콧대에 흡사 막대기를 하나 꽂은듯한)이 모두 비슷해졌다는 것, 1990년대 중, 후반 또는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친구들답게 유년 시절 충분히 공급된 영양으로 발육 상태가 남다른 그녀들의 나이를 분간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얼굴과 몸매만으로 쉽게 그녀들의 나이를 추정하려다가는 포털 사이트의 인물검색 결과가 당신의 두 눈을 의심케 할 것이고, 섣부르고 어설픈 당신의 판단을 아주 작살낼 것이다.

핑클과 SES의 시대가 저물고, 무수히 많은 걸그룹이 뜨고 또 지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신속하게 세대교체를 반복했고 따라서 대부분의 걸그룹은 금방 나락의 길을 걷기 일쑤였다. 내가 이등병 딱지를 달고 발톱엔 피를, 이마엔 땀을 흘려가며 생활관을 청소할 때 ‘슈빠두빠디빠’를 외치던 어떤 걸그룹에게 우리 전우들은 급하게 달아오른 냄비처럼 발광했었으나, 그것은 이내 금방 식어버렸고 급기야 우리는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녀들을 ‘퇴물’이라고 칭했다. 뒤늦은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번외)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걸그룹의 몇 가지 패턴

1: 개중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1명의 스타가 원인불명으로 탄생하고, 그녀가 부지런히 광고를 찍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어쩌다가 연기에 꽂혀 링거 투혼의 ‘연기자’가 되고, 다시 그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그녀의 본적을 궁금해하는 대중들이 그녀가 몸담고 있는 걸그룹을 체크하고, 그 안에서 다시 차선의 한 소녀를 골라 다시 새롭게 데뷔시키는 과정을 겪으며 성공하는 걸그룹.

2: 하나도 안 웃기고 그다지 새롭지도 않은데, 그녀들만 보면 배를 잡고 죽을 듯이 포복절도하는 유재석을 위시한 예능 스타들의 개인적 호감에 의해 탄생하는 인기 걸그룹.

3: 가장 흔한 케이스로서 강력한 소속사의 배경을 기본으로 깔고, 시작부터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걸그룹
4: 군인들의 함성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덕을 쌓아 역으로 공중파에 진출하는 걸그룹.

5: 주접떨고, 떠들고, 까불고, 악을 쓰며 가까스로 이목을 집중시켜 욕 처먹으며 이름 알리는 걸그룹.

6: 배우 이병헌과 카톡 하다가 내친김에 이름을 알리는 걸그룹.

7: 6에 실패하여 과감한 노출을 감행하여 이름을 알리는 걸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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