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9/10(화), Nav 그리고 Notorious B.I.G.
오늘의 첫 번째 추천곡은 인도 펀자브 지방 출신 캐나다 래퍼 Nav의 'Champion'입니다. 힙합 씬의 독보적인 패션 스타일리스트이자 랩 스타일리스트 Travis Scott이 피처링에 참여해 곡을 완성합니다. 곡의 주제는 요즘 노래답게 단순합니다.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NBA의 챔피언에 비유하며 자축하는 노래입니다. Nav의 뿌리 인종인 인디언 특유의 하이 피치가 마치 오뚜기 3분 카레의 코를 자극하는 향미처럼 진하게 두드러지며 곡에 생기를 불어넣고, Travis Scott의 감각적인 라인 구성과 자꾸만 듣고 싶은 오토튠 보이스가 곡에 재미를 더합니다.
We got the trophy like a Champion
Fell asleep right on a jet, we gone
Big rings just like a Champion
No TSA, hop on a jet, we gone
이 허세로운(?) 가사 한 번 보시죠.
No TSA, hop on a jet, we gone
여기에서 TSA는 미국의 Transportation Security System교통안전청을 말합니다. 개인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Nav와 Travis Scott은 번거롭고 귀찮게 TSA 보안 검색을 할 필요가 없겠죠. 그냥 프라이빗 비행기에 올라타서 떠나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저는 이 곡을 운동할 때 자주 듣습니다. 트랙 위를 아무 생각 없이 돌면서 에어팟으로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진짜 챔피언이 된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노래의 힘이 그런 거잖아요. 실제로는 존못인데, 어떤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치 내가 존잘이 된 듯한 쾌감을 느낄 수도 있고, 슬픔의 감정이든 기쁨의 감정이든 우울의 감정이든 현재의 기분과 상황에 어울리는 곡을 하나 선택해서 들으면 해당 감정과 상황의 극한으로까지 나를 몰아넣을 수 있는 인생의 좋은 재료가 노래가 아닌가 싶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요즘 시대의 한국 사람들은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디어내고 버텨낸다는 문장을 읽고 슬펐습니다. 2019년입니다. 인생을 견뎌내고 버텨낸다는 것은 닥쳐올 일들을 모면하고 회피하는 방어적인 태도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인생을 견딘다, 버틴다는 건 오히려 생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지가 담긴 우리들의 가장 합리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진지해졌는데요, 아무튼 여러분, Nav의 'Champion' 들으시고, 부디 인생의 Champion이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의 두 번째 추천곡은 미국의 레전더리 래퍼 Notorious B.I.G(이하 Biggie)의 마지막 사후 정규 앨범 <Duets: The Final Chapter>-사실 위 앨범은 앨범의 타이틀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듀엣을 중심으로 한 Biggie의 최후 앨범인 셈이죠-의 수록곡 '1970 Somethin''입니다. 노래는 래퍼 The Game과 Biggie의 생전 와이프였던 알앤비 아티스트 Faith Evans가 참여했습니다.
돌아보면 약 17년 전, 제가 처음 미국 힙합 세계에 대해 공부할 때(마치 학교의 정규 교과 과목인 것처럼 진지하게 몰입했어요, 실화입니다), '동부 힙합', '서부 힙합', '남부 힙합' 이런 용어(?)들이 자주 나왔어요. 요즘에는 아예 종적을 감춘 사어(?)가 된 듯한데요, 당시만 해도 그런 용어들이 실제로 많이 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편을 갈라 총을 들고 대립의 각을 세우던 살벌한 시대였습니다.
90년대 초중반, 미국의 동/서/남부 지역 출신의 래퍼들과 프로듀서들은 서로 각기 다른 색깔의 음악을 만들어 대중과 교감했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진하게 받는 동물이기 때문에 마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해수욕을 즐기던 때의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고 사람들이 플립플랍을 질질 끌며 들뜬 기분으로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미국 서부 지역의 환경 속에서 나고 자란 힙합 아티스트들이 우중충한 비트 위에서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이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고찰, 음침한 지하 녹음실에 대한 단상 같은 걸 읊조린다는 건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욕의 빈민가에서 나고 자라며 어릴 때부터 생존을 위해 '약'을 팔고 '총기'를 거래하며 심심하면 가게의 물건을 털고 친한 친구들이 총격에 의해 하나 둘 죽어나가는 경험을 했던 아티스트들이 밝고 경쾌한 비트 위에서 무진장 신나는 인생에 대해 떠든다는 건 조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 것이죠. 참고로 요즈음의 미국 메인스트림 힙합과 대한민국의 주류 힙합은 당시의 기준으로 '남부 힙합'에 아주 가까운 음악들인데요, 기회가 된다면 이 부분에 대해 글을 써 봐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오늘의 추천 아티스트 Biggie는 '동부 힙합'을 대표하던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래퍼입니다(사실 그 자체로 동부 힙합의 동의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Biggie는 힘이 꽉 들어찬 목소리를 가지고 루즈하고 편안한 느낌의 래핑을 선사했고, 허점 하나 없이 비트에 잘 들어맞는 라임 메이킹과 센스 있는 워드 플레이, 타고난 스토리텔링 능력 등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스타일 전반은 이후 등장한 수많은 후배 래퍼들에게 어마한 영향을 준 미국 힙합 씬의 국정 교과서가 되었다는 것이 랩학계의 정설입니다.
Biggie의 생전 앨범 <Ready To Die>(1994)와 Life After Death(1997)나 사후 앨범 Born Again(1999)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평단으로부터 심지어 욕도 많이 먹었어요), 2005년에 발매한 <Duets: The Final Chapter>는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앨범입니다. 2006년, 고등학교에 입학해 야간 자율 학습(이라고 쓰고 야간 타율 학습이라고 읽는)이라는 무서운 관습의 습격으로 난생처음 '저녁 없는 삶'에 어색한 발걸음을 뗐던 그때, 창가 벽 쪽으로 바짝 붙어 앉아 어둑해진 바깥 하늘을 울적하게 바라보며 몰래 CD Player를 꺼내 듣던 최초의 앨범이기 때문입니다.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정말 지겹도록 반복하던 앨범이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던 곡이 바로 8번 트랙 '1970 Somethin'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싸이월드 BGM으로도 깔았던 생각이 납니다. 정말 틈을 노린 야무진 TMI(Too Much Information)가 아닐 수 없네요.
'1970 Somethin'은 사실 미국 힙합의 클래식 명반이자 Biggie의 정규 데뷔 앨범 <Ready To Die>의 수록곡 'RESPECT' 속 Biggie의 래핑 위에(RESPECT의 라인을 그대로 샘플링) 완전히 다른 멜로디, 래퍼 The Game과 알앤비 아티스트 Faith Evans의 라인을 추가로 얹어서 만든 편집 곡입니다. 이런 연유로 Biggie의 듀엣 앨범은 욕을 배불리 먹기도 했었습니다(화려한 피처링 군단으로 중무장한 알맹이 없는 앨범!)
가사는 Biggie의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탄생 비화를 시작으로 연대기적인 접근을 통해 그의 성장 과정을 그려냅니다. Biggie 식의 '그땐 그랬지', 1970 Somethin', 소스를 제공한 원곡 'RESPECT'와 비교해가며 지금 바로 들어보세요. 두 곡 모두 환장합니다.
오늘의 화요 힙합 음악 추천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다음 주에 새로운 두 곡과 함께 찾아뵐게요.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래퍼 Nav에 대해서는 일전에 스눕피의 힙합 이야기 포스팅('미국 힙합 씬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인도인')을 통해서 짧게 소개한 적이 있었으니 해당 포스팅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 프런트 이미지 출처: ephot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