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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Feb 04. 2020

패션 브랜드 Aries Arise에어리스 어라이즈 단상

No Problemo, No Problemo, No Problemo!


며칠 전 런던 기반의 패션 브랜드 Aries Arise에어리스 어라이즈의 노랗게 예쁜 티셔츠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No Problemo'라는 핑크색 글자가 나를 움직였다.



노 프라블레모!

문제없다, 별 일 아니다, 괜찮다, 상관없다.




말 많고 탈 많은 2020년을 철저하게 비웃고 무시하는 염병하게 아름다운 그 말, '노 프라블럼'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듣는 것이 인생이다. 고로 내 인생은 노 프라블럼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No Problemo' 드립의 발원지로 시트콤 The Office'를 꼽겠다.



Michael: Hi, Carol. How you doing?
하이, 캐롤. 어떻게 지내요?

Carol: I'm great. I just needed one last signature for your mortgage insurance.

잘 지내고 있어요. 모기지 보험 관련해서 최종 서명이 필요한데요.

Michael: Oh, hey, no problemo. Incidentally, I love the place.

오, 네, 문제 없어용~ 그건 그렇고 집이 정말 마음에 드네요.

-시트콤 The Office S2E22 중에서-




브랜드 Aries Arise의 정신이 궁금해졌다. 내 취미다. 궁금해하기. 내친김에 'Aries Arise'의 브랜드 북을 다운로드하였다. 이 세상엔 무려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너무나 많다. 정말이지 감사해서 죽을 지경이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라는 말은 '이 세상엔 공짜가 넘쳐난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극소수가 자신들의 배를 자꾸만 불려 나가기 위한 수작이라고 본다. 더불어 누가 감히 인터넷을 쓰레기의 바다라고 부르는가. 인터넷은 지혜의 더미가 아니던가!



(이미지 출처: Aries Arise 브랜드 북)



Aries Arise의 브랜드 북 속을 들여다보니 쏟아지는  맹렬한 이미지 레퍼런스 더미와 함께 Aries Arise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Sofia Prantera의 담담한 자기소개서가 한 장 실려있다. 그야말로 명품 에세이다.



하마터면 못 읽고 넘어갈 뻔했다. 빨간 글씨라니! (이미지 출처: Aries Arise 브랜드 북)



손수 프린트까지 해서 감탄하며 몇 번이나 읽어봤다. 읽기에 따라 누군가에겐 투박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글이다. 하지만 대단한 울림이 있다. 개인의 역사는 모두 나름의 뜨거운 울림이 있는 법이다. 마치 동헬(동네 헬스장)의 전동 벨트처럼.

소위 자기소개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젠체하며 등판한다면 그녀의 글을 어떻게 품평할까. 아니, 사실 누가 누구의 진심 어린 글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문장이 길다, 짧다, 만연체다, 형용이 많다, 매끄럽지 않다, 순서가 안 맞다 etc.

정해진 순서에는 안 맞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을 정해진 순서에 맞는 따분하고 지루한 삶의 기준에 맞추어 평가해 '틀린' 사람으로 간주하려는 아이러니!




최근에 Ferg와 나는 밀라노에 있었는데, 바에서 아침을 주문하고 나서 선불 지급을 요청받았다. 그때 나는 비싼 디자이너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계산을 하면서 로고가 보이도록 가방을 돌렸다. 웨이트리스는 갑자기 사과를 했다. 럭셔리 브랜드를 확인하기 전에 그녀가 우릴 어떻게 생각했던 건지 또 그 브랜드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낸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 가방은 가짜였거나 훔친 것이었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 사건은 패션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지를 내게 알려주었다. 내가 왜 항상 패션에 얽매였는지도 깨닫게 했다. 좋든 싫든 패션은 우리 삶의 방식과 매일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나는 Aries 브랜드의 본질을 '정의 내릴 수 없게' 만드는 데 더욱 감정 이입했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외형을 해석하는 방식에 어떤 미묘한 챌린지를 주자고.

-Aries Arise 브랜드 북 중에서-




이탈리아와 미국의 피가 절반씩 섞인 Sofia Prantera는 그녀의 브랜드를 '정의 내릴 수 없게' 정의 내리려 노력한다. 위 사연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녀는 패션 브랜드의 중심에 'Undefinable'이라는 컨셉을 박아 넣었다. 그야말로 흐리터분한. 그래서 Aries Arise는 엘레강스와 스트리트 사이, 그 어딘가를 맴돌며 자기를 규정하고 있는 듯 보인다. 역설적으로 아무나 쉽게 정의내릴 수 없도록.



(이미지 출처: instagram.com/ariesarise)




그녀는 '말이 안 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차려입지 않은 것'으로부터 더욱 쿨함을 느끼며, 스트리트 웨어가 곧 패션이고 패션이 곧 스트리트 웨어였던 1980년대의 감성으로 역행하길 원하고, 오래된 빈티지 그래픽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미지 출처: Aries Arise 브랜드 북)



브랜드 Aries Arise의 DNA 속에는 80/90년대의 유스 컬처의 바이브가 넘쳐흐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에서 지낸 그녀의 유년 시절을 장악한 건 다름 아닌 '만화책'이었고,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일한 곳이 'Slam City Skates'라는 런던의 스케이트 보드 브랜드였단다. 'Slam City Skates'에서 처음 만난 Aries Arise의 공동창업자이자 디자이너 Fergus는 스트리트 브랜드 'Palace'의 Tri-Ferg 로고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데, 이제야 Aries Arise의 로고가 조금 더 선명히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창업자 Fergus의 별자리가 Aries(양자리)이고, Sofia의 별자리가 Taurus(황소자리)란다. 브랜드명은 서로 연결된 두 별자리를 뜻한다. Aries에서 Arise하다.




아, 입이 근질근질하다. 역시 글이란 샛길로 빠져야 제맛이다.


군에서 제대한 이십 대 초반 남자 대학생의 통과의례 중 하나는 스트리트 웨어를 입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잘 소화하는 사람은 열 명 중에 하나둘 될까 말까인데, 죽자고들 입는다. 나 또한 하나도 안 어울리면서 미련하게 사 입고 홀로 만족하던 잔챙이 중 하나였다. 당시 내가 사 입었던 티셔츠 중 하나는 슈프림이라는 브랜드의 'Fuck You We Do What We Want'라는 티셔츠였다. 결속력 있는 집단에 속해 우정을 다져본 일도 별로 없고 따분하고 조용하며 지루한 일상을 보낸 내가 어쩌자고 'Fuck You We Do What We Want'라는 글자를 가슴에 박고 싸돌아다녔는지. 대학생 신분에 해당 제품의 가격이 싸서 산 걸로 기억하지만 아무튼 내 성정과 이력에 걸맞지 않은 티셔츠를 입는 게 너무 거슬려서 서브웨이 샌드위치라도 몇 개 사 먹으려고 중고나라에 싸게 팔아치웠다(참고로 서브웨이는 사우스 웨스트 소스가 정답이다).


 

인생 교훈 하나, "어울리는 걸 입어라. 걸맞게! 새끼야."



넷플릭스의 [My Next Guest Needs No Introduction with David Letterman] 시즌 2에 래퍼 카니예 웨스트가 나온다. 영상의 중간에 카메라가 그의 집 안에 있는 브랜드 'YEEZY'의 쇼룸을 잠시 비추는데, 해당 장면에서 카메라는 카니예 웨스트의 어머니 Donda West와 선배 래퍼 Eazy-E의 사진이 프린팅 되어 있는 흰 티셔츠를 비춘다. 그리고 카니예 웨스트는 그것을 두고 'Spirit Shirt'라고 부른다. 사진 프린팅 속의 인물의 정신을 자기 삶으로 들여 다시 한번 되새기는 개념일 것이다. 그는 덧붙인다. 비즈니스 미팅을 할 때면 사업적인 머리가 비상했던 선배 래퍼 'Eayz-E'의 사진이 프린팅 된 티셔츠를 입는다고.



카니예 웨스트와 그의 스피릿 티셔츠들.



그런데 어디 사진 프린팅만 '스피릿'을 담고 있을까. 티셔츠에 새겨진 여러 가지로 많은 각기 다른 레터링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나처럼 무언가에 빠져드는 최초의 계기나 그것을 지속하여 좋아하도록 추동하는 대상이 '말'과 '글'인 사람들에겐 더더욱.


No Problemo라는 티셔츠에 꽂혀서 Aries Arise라는 브랜드를 탐구하고 마구 샘솟는 잡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다가는 여기까지 왔다. 쥐뿔도 없는 놈이 사고 싶은 옷은 또 우라지게 많아서 한 달에 딱 하나씩만 사자고 스스로 결심했다. 이번 달엔 'No Problemo' 티셔츠를 사긴 글렀다. 하지만 이 기세라면 3월 1일에는 결제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노 프라블레모니까!

정말이지 자기 합리화를 하고 싶을 때마다 꺼내 입기 좋은 옷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여러분의 스피릿 셔츠로 'No Problemo' 티셔츠를 추천합니다.


어떤 작가가 그랬다. "문제가 없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무언가 문제가 있는 상태를 인정하는 꼴이라고. 어쩌라는 건지? 인생이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이미지 출처: instagram.com/ariesarise)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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