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스눕피 Jun 04. 2020

몰래 훔쳐볼 만한 사람이 있어야 인생이 살맛 난다.

몰래 훔쳐보니까 매력적인 것이다.



몰래 훔쳐볼 만한 사람이 있어야 인생이 살맛 난다. 인생이란 역시 저마다 은밀한 것이 매력이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흠모하던 학원 수학 선생님의 싸이월드에 몰래 들어가 그녀의 사진을 훔쳐볼 수 있음에 그저 행복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삼국지라는 소설을 도대체가 얼마나 많이 반복하여 읽은 것인지 그것의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줄줄이 투박하게 외며 나의 휴식 시간을 풍성하고 즐겁게 꾸며준 짝꿍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몰래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자기만의 단단한 콘텐츠가 개인을 얼마나 빛내주는 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존경하는 래퍼나 소설가의 말과 글을 훔쳐보며 그들의 말글이 마치 나의 생각인 것처럼 내 속에 소중히 보관하고 때로 꺼내어 사용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이 내 나이를 통과할 때에는 뭘 하고 살았는지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그들의 인생을 나의 현재 옆에 나란히 두고 위안하거나 자극받기도 했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인생이란 전인미답이니 너만의 삶을 살라,라고 소리치며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자칭 '인생 멘토'라는 사람들도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무척이나 막막해하던 청소년 시절을 통과했을 거란 생각을 하면 확 깬다. 무엇보다 "선생님, 제발 저의 멘토가 되어주세요"라는 정중하고도 집요한 누군가의 부탁에 마지못해 응답하는 식도 아니면서 자기를 '인생 멘토'라든지 '사회 멘토'라고 참칭하는 사람들의 속사정은 도대체가 무언지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성인이 된 2009년부터는 매 시기별로 나의 인생을 휘감은 수많은 블로그 그리고 그것을 운영하는 블로거들이 있었다. 내 마음을 움직인 블로그를 즐겨찾기에 추가해두고 틈틈이 들어가 그들의 생각을 훔쳐보았던 것인데, 그중에서도 몇몇 사람들은 한 번쯤 만나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Like-minded,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생각하는 것도 닮아있는 사람들이거나, Wanna-be,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하고 싶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도 분명 내 식으로 누군가를 훔쳐보며 자랐을 텐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몰래 훔쳐보고 또 훔쳐봄을 당하며(?) 이리저리 어지럽게 뒤엉켜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답도 없이.


그래서 나는 요즈음에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많은 현대인들이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또는 유튜브로 손쉽게 자기를 드러내며(또 은근히 그것을 즐기며) 살다 보면 앞으로 한 10년 후에는 성향이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절로 뭉쳐져(자석처럼 이끌리며) 이 사회에 어떤 독특한 구획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 말이다. 본인이 속한 구획 안에서는 아주 친밀하고 자유롭게 사람들이 교류하지만, 해당 구획을 조금만 벗어나도 눈물이 나도록 배타적인 생활을 각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상상. 그런데 이렇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비슷한 것들을 좋아하고 비슷한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공동체는 생각만으로도 징그럽고 토악질이 나온다. 나의 구획에 속할 사람들의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어두컴컴한 아지트 안에 떼거리가 모여있다. 그곳엔 미국 힙합 그룹 Migos의 노래 ’Taco Tuesday’가 크게 흐르고, 벽면엔 빔 프로젝터가 영사하는 미국 시트콤 <The Office>가 음소거된 상태로 껌뻑인다. 물론 그들은 전부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무척 좋아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들은 한식보다는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잡수길 선호하고, 샌드위치 주문 시 빵 선택은 플랫 브래드로, 소스 선택은 사우스웨스트와 마요네즈 또는 랜치를 섞은 조합으로, 야채는 오이와 피클을 빼는 선택을 하며 라즈베리 치즈케이크 쿠키와 제로콜라를 추가하여 세트로 주문하는 것이다. 아, 상상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걸?


몰래 훔쳐볼 만한 사람이 있어야 인생이 난다. 몰래 훔쳐보니까 매력적인 것이다. 몰래 훔쳐보니까 봐줄 만한 것이다. 대놓고 어울리면 은밀하게 훔쳐볼 때의 매력이 완전히 사그라든다. 기대가 무너지고 감동이 사라진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도 몰래 훔쳐보니까  아름다운 것이다. 그들의 실상을 알고  깨는 모습을 지켜보면 우라지게 슬퍼서 눈물이   것이다. .


그나저나 내가 뭘 안다고 자꾸 인생을 들먹이며 떠드는지 모르겠다. 쩝. 어떤 여자 아나운서가 그랬다. '너답다'라고. 그래, 나도 참 나답다.


다 훔쳐봤으니, 일단 튄다!



매거진의 이전글 읽고 쓸 줄 모르는 할머니.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