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 엔젤스Palm Angels, 이탈리아인의 시선으로 LA를 재해석하다.
책 읽기를 즐기는 선생님들께서는 '요즘엔 읽고 싶은 책이 통 없어'라거나 '책 한 권만 추천해줄래?'라는 주변의 말씀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책 읽기는 그 안에 든 또 다른 책 읽기를 자연스럽게 부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단 한 권의 책 읽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기만 한다면 그 이후로는 다음에 읽어야 할 책들이 머릿속과 스마트폰 메모장 속에 걷잡을 수 없이 두둑이 쌓이기 마련이니까요. 나중엔 마치 하루 이틀 지난 안동 찜닭 속 당면처럼 불어 터져서 감당이 안 됩니다(따로 덜어낼 수도 없고). 작가들이란 대개 자기가 열렬히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어떡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글 속에 노출할까를 궁리하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책 속의 책이라는 숨은 재미를 알아채는 순간이 아마도 활자 중독이 시작되는 두 번째 단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미국의 힙합 음악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하니 미국 래퍼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훔쳐보는 것도 당연히 좋아하죠. 그중에서도 래퍼들의 '패션'은 저를 미치게 합니다. 래퍼들의 개성 있는 패션 스타일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쾌해집니다. 일종의 예술 작품 같은 거죠. 예를 들면 래퍼 카니예 웨스트의 주옥같은 패션 색감과 독보적인 핏은 볼 때마다 감탄을 부릅니다. 어떤 선생님들은 그의 스타일을 두고 '아재 패션'이라고 평가절하하던데요, '아재 패션'과 '럭셔리 스트리트웨어' 사이의 그 종이 한 장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그의 아슬아슬한 스타일링이 저는 좋습니다. 그건 분명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러하니 패션 사업으로 1조 원의 자산을 축적할 수 있지 않았겠나요.
앞서 언급했듯 한 권의 책 읽기가 또 다른 책 읽기를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처럼 힙합 음악과 래퍼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은 힙합 씬을 수놓는 패션 브랜드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하죠.
오늘 소개하고 싶은 패션 브랜드는 미국의 래퍼들이 정말 좋아하는 브랜드 중 하나인데요, 이탈리아 출신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 미국 문화를 재해석해 새롭게 선보이는 개성 있는 패션 브랜드 'Palm Angels팜 엔젤스'입니다.
제가 팜 엔젤스는 아니지만,
선생님들, 일단 반갑습니다.
'팜 엔젤스'의 설립자는 Francesco Ragazzi(이하 FR) 선생님인데요, 이름에서 느껴지시죠? 네, 이태리 사람입니다.
2014년에 동명의 사진집을 발간한 것을 계기로 2015년에는 아예 패션 브랜드를 론칭해 버렸어요.
어느 날 FR 선생님께서는 작은 카메라 하나를 들고 미국 LA에 놀러 가서 Venice Beach라는 곳에 들릅니다. 그리고 LA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뻑이 가버립니다. 그렇게 그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 인화하여 쭉 보던 선생님은 '뭔가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죠.
이후 더 좋은 카메라를 들고 약 2,3년에 걸쳐 LA에 몇 번이나 더 들러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 기록하던 선생님은 내친김에 그것들을 묶어 사진집으로 발간하게 되는데, 그것이 팜 엔젤스의 시작점이었죠.
브랜드명 Palm Angels 속 Palm은 LA의 야자수를 뜻하고, Angels는 스케이트 보드를 타던 어린 친구들이 천사 같이 느껴져서 붙인 이름이랍니다.
FR 선생님께서는 사실 대한민국에도 널리 알려진 브랜드 'Moncler몽클레어'의 아트 디렉터이기도 한데요, 십여 년 전 몽클레어의 홍보팀에 입사해서 존버 끝에 아트 디렉터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출생으로 미국 대학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패션 포토그래퍼가 되고 싶었는데, 취업이 힘들어서 일단 홍보팀으로 입사한 모양이에요. 인생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한 번에 되는 게 어디 있겠어요.
아무튼 그는 몽클레어에서 인연을 맺은 미국의 패션 아이콘이자 래퍼 '퍼렐 윌리엄스'가 'Palm Angels' 사진집의 서문을 써주는 것으로 개인 사진 프로젝트를 알리고(반칙이잖아?), 뒤이어 주변인들의 권유와 도움으로 동명의 패션 브랜드를 론칭하기에 이르는데요, 그것이 2015년의 일입니다.
LA라는 도시에 놀러 가 느낀 개인적인 감동을 사진으로 기록한 퍼스널 프로젝트가 하나의 패션 브랜드로 진화하게 된 것이죠.
심지어 브랜드가 존재하기도 전에
사진집을 만들면서
브랜드를 구체화할 수 있었어요.
프로젝트가 어떻게 발전할지
전혀 몰랐지만,
그 안엔 아름다움이 있었죠.
스포티, 슈퍼 럭셔리, 이태리 감성 등 서로 다른 수식을 불러오는 브랜드 팜 엔젤스는 유연하게 구부러질 줄 아는 패션 브랜드입니다.
FR 선생님께서도 이탈리아의 테일러링과 미국 LA의 느긋하고 편안한 감성(laid-back)이 섞인 브랜드라는 점을 강조하고 또 자랑스러워하고 있는데요, 스케이터들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을 섞었다고 덧붙입니다. 좋은 건 다 취하려고 하는 심보가 조금 고약하지만, 지루한 건 용납이 안 되는 이 시대에 경계를 넘나들고 기존의 틀을 깨려는 시도는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
LA의 작열하는 태양, 스케이트보드, 야자수, 대마초, 밥 말리, 힙합 아티스트 등은 팜 엔젤스가 취하는 영감의 대상입니다. 설립자 FR 선생님의 개인적인 취향을 디자인 속에 성실하게 녹여내는 겁니다. 특히 팜 엔젤스는 일종의 브랜드 협찬에 대해서 드러내 놓고 반색을 표하는데, 이유인즉슨 특정 셀럽들을 염두에 두고 옷을 만드는 경우가 있을 정도라는 겁니다.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팜 엔젤스라는 브랜드 또한 결국 이 세상에 널린 주옥같은 레퍼런스들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 새롭게 선보인 '개인 감동 체험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전에 스눕피의 브런치를 통해 소개한 바 있는 브랜드 'Aime Leon Dore'가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요.
누구나 비슷하거나 똑같은 체험을 하며 삽니다. 구체적으론 달라도 전반적으론 비슷하게요. 개인적으로 FR 선생님의 인터뷰를 깡그리 긁어모아 읽다가 선생님께서 난생처음 LA에 도착해 공항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맡았던 냄새와 그 기운을 인상 깊게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아, 이 동네는 대마초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는군."에서 그칠 것인가 아니면 그 순간의 인상적 감각을 자신의 업에 연결해 생산적으로 활용할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참고로 저는 전자입니다. LA에는 어딜 가나 똥냄새가 진동한다고 과장하면서 떠벌리고 말았겠죠. 알맹이 하나 남기는 것 없이요. 사실 저는 LA에 가본 일이 없습니다.
'Jack of All Trades'라는 표현이 있죠. 이것저것 다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두고 이르는 표현인데, 긍정적으로 잘 쓰인다면 '어쩌면 너는 못하는 게 하나도 없니?" 정도의 간지가 터져 나올 것이고, 조금 비아냥대듯이 활용한다면 "어쩌면 너는 이것저것 다 조금씩 잘 알고 잘하는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니?" 정도의 스토리가 풀어질 것입니다.
팜 엔젤스의 설립자 FR 선생님 또한 'Jack of All Trades'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패션 고향 '몽클레어'의 아트 디렉팅과 전반적인 컨설팅부터 '팜 엔젤스'의 HR, 마케팅, 디자인, 화보 촬영 등을 모두 신경 쓴다고 하니까요.
요즘엔 '스페셜리스트'가 각광받는 시대임에는 분명하지만, 이것저것 조금씩 건드려보면서 반응을 확인하고, 인기가 있을만한 것들을 영리하게 잘 캐치하여 예쁘게 포장해 보여주거나 잘 조합해 내세우는 어떤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제너럴리스트'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듯합니다.
패션업계를 예로 들자면 따로 패션 디자인이나 의상학을 공부하지 않고도 '옷'을 잘 만들어 잘 팔고, '돈'도 잘 벌어서 잘 쓰는 선생님들이 많죠. 대학에선 사진을 공부하고 몽클레어의 홍보팀 인턴으로 일을 시작한 Francesco Ragazzi 선생님도 비슷한 경우일 겁니다. 보고 배울 점이 참 많아요.
'Jack of All Trade' 그리고 '스페셜리스트'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요,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인정하고, '전문가' 내지는 '정통'이라 참칭하는 어떤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이제는 덜 보고 싶습니다. '스페셜리스트'를 존중해달라며 급을 나누고 자기의 노력만이 가상한 것처럼 포장하는 모습은 추악합니다. 그래서 저는 유튜브, 블로그, 인스타그램, 틱톡 세상이 너무 좋습니다. 드디어 가짜들이 입을 다물고, 진짜 선생님들이 입을 여는 시대가 도래했으니까요! 정당성 없는 권위에 짓눌려 지쳐 널브러져 있던 진짜 실력자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미국에선 이탈리아인의 시선으로 문화를 재해석하고, 이탈리아에선 보다 자유로운 LA의 감성으로 살아간다는 아웃사이더 디자이너 Francesco Ragazzi, 그는 급하게 주목받고 스러지는 브랜드보다는 천천히 인정받는 헤리티지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다고 합니다. 스무 살에 처음 만나 삽십대에도 즐겨 입을 수 있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는 선생님의 표현처럼요.
저도 '이방인'의 시선을 견지한 채 세상을 달리 보며 지내볼까 해요.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말만이라도요. 아, 그리고 뭘 하든지 찬찬히 인정받으며 롱-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선생님들도 언제나 파이팅입니다.
<글을 마치며>
중등학교 시절, 외국 래퍼나 힙합 음악, 패션 브랜드, 도서 등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갈증이 늘 있었는데요, 그것들과 관련한 외국 기사를 열심히 번역해 소개하는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정말 행복했습니다. 예전에 미국 힙합 앨범을 한국 라이센스 버젼으로 사면 그 안에 앨범 수록곡의 가사를 해석해 소개하고 또 해당 래퍼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주는 Booklet이 들어있었는데요, 그것을 찬찬히 뜯어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던 기억도 나네요.
아무튼 제가 이 브런치를 운영하는 목적 중 큰 부분이 바로 이 이름 모를 선생님들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 측면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브런치 작가 소개의 [기타 이력 및 포트폴리오] 란에 '저의 값싼 시간을 들여 쓴 글로 여러분의 비싼 시간이 절약되길 바랍니다.'라고 적어둔 것도 그 이유였지요.
작년에 면접을 한 차례 보는데 한 회사 대표라는 사람이(미국인이었어요) 저한테 그러더군요. 이런 거 소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시간 낭비라고. 왜 하는 거냐고. Don't Give A F*ck이라고요. 그때 화딱지는 안 나고 문득 그런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요. 못난 사람이 하지 말라면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지잖아요.
제 포스트는 단 한 사람이라도 읽어준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제가 이 브런치를 통해 몇 번이나 밝혔어요. 그런데 제가 쓴 어떤 글은 16만 명이나 보기도 했죠. 이 정도면 스눕피 주제에 성공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거 소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며 발끈하던 그때 그 사람의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도 했네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언제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