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을 보여준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책을 읽을 땐 되도록 밑줄을 자주 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름 붙이는 걸 좋아하니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흔적을 남기는 책 읽기>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까. 언젠가 내 신경을 잔뜩 건드렸을 것이 분명한 문장들, 그렇기에 그것들의 아래엔 마치 내 성격처럼 곧지 못한 펜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거겠지.
짐작으로 밖에 알지 못했던 상대방 삶의 가려진 쪽에서 튀어나온 새로운 이야기 때문에 어제오늘 당황하여 허둥지둥하고 있었는데,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러 조용히 집어 든 아무 책(장 그르니에의 '섬')의 아무 페이지(90) 위에선 나를 골리기라도 하듯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한 고작 몇 줄의 문장이 나의 속을 꿰뚫듯이 노려본다. 마치 대기업 최종 면접 자리에서 비굴하게 어깨를 말고 고개를 끄덕이며 헤헤거리는 취업 준비생을 내려다보며 자기 삶의 관록을 과시하다가는 그의 기를 팍 죽이려 정문일침을 놓는 백발의 최고경영자처럼.
우리가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그들 삶의 가려진 쪽이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이라는 장 그르니에의 메시지는 무척 당황스럽게도 내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 더미를 단 몇 줄로 정리해주더니 별안간 뒤통수를 몇 대 세게 후려친다. 마치 해피투게더 시즌1 쟁반 노래방의 은색 쟁반처럼.
내 생각에 적어도 10년은 가까이 된 밑줄 같은데, 검은 표시가 있으니 내 눈에 들어왔고, 눈에 들어와서 설렁설렁 읽어 줬더니 사람의 속을 쿡쿡 찌르는군요. 마치 학창 시절, 수학 문제가 도저히 풀리지 않아 막막하던 차에 문제집의 맨 뒤에 붙어있는 빳빳한 답안지를 들춰보는데, 몇 시간에 걸친 나의 처절한 노력과 수고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단 한 줄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범 답안'의 잔인함처럼.
요즘 시간이 남으면 래퍼 카니예 웨스트의 인생사를 시간순으로 들입다 파고 있는데, 인상적인 대목이 하나 있었다. 그가 주로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이제 막 '래퍼'가 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던 십수 년 전, 그의 작업실에 우연히 들른 사람들의 증언인데 그의 방에 딱 들어가면 남성 잡지 GQ가 탑처럼 쌓여 있었고, '샘플링'할만한 좋은 곡을 찾기 위한 그의 노력으로 시대를 거스르는 명반들이 그의 주변을 발 디딜 틈 없이 덮고 있었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탁월한 천재성은 결국 그가 끝을 알 수 없이 게걸스레 흡수해댄 다종다양한 래퍼런스에 밑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더 확고해진다. 하긴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이 정도 풍문도 없으면 어디에 쓰겠나.
데이비드 레터맨
최신 앨범이 <Ye>죠? 앨범 커버가 와이오밍주 티턴 국립공원에 있는 그랜드 티턴 산의 상징적인 사진이죠. 산 아래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고요. "난 조울증이 정말 싫어, 끝내주지!" 정말 좋은 솜씨라고 생각했어요.
카니예 웨스트
감사해요. 그 이미지는 제가 인스타그램 어떤 포스트에서 본 건데, 차고 가장자리에 쓰여 있는 거였어요."
<My Next Guest Needs No Introduction with David Letterman> 중에서
갑자기 뚱딴지 같이 웬 카니예 웨스트 얘긴가 싶으시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좋은 책, 좋은 음악, 좋은 이미지를 많이 흡수하는 건 그 자체로 정말 좋은 일인데, 그것들을 경험하는 순간의 인상적인 감동을 전해준 대목에는 따로 물리적인 흔적을 남겨놓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다는 시답잖은 단상이었습니다. 노트를 꺼내든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든 밑줄을 긋든 확 찢어버리든. 도저히 생각 정리가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어디선가 읽었거나 들었던 것 같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쉽게 찾아 다시 한번 되새김질하면 엉켜있던 생각이 단숨에 풀어지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요. 마치 초등학교 시절 환장을 하고 달려들던 실뜨기 놀이처럼 말이죠. 되도록이면 기쁘고 즐거운 경험과 함께 연결되는 흔적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고.
개인적으로는 참 우울한 주말이었는데, 앞서 잠깐 언급한 래퍼 카니예 웨스트의 정규 8집 앨범 <Ye>의 수록곡 'Ghost Town'과 샘플 원곡 Royal Jesters의 'Take Me For a Little While'이 나를 적잖이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리 유쾌한 감정은 아니기에 노래 추천이 조심스럽지만, 아무튼 위 두 곡을 추천드리며 주말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워낙 유명한 곡이기에 궁색한 추천이 아닐까 싶은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요.
노래 가사처럼 우리 모두 언젠가 빛나는 왕관을 쓸 수 있길 바랍니다. 아무튼 우울하고 또 우울한 하루인지라 가사가 마음 깊숙이 다가오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