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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Oct 12. 2020

주말이면 인천의 골목골목을 싸돌아다닙니다.

내 고장을 몇 시간씩 걸으며 생각하고 또 느낀다.



<선택적 인천 홍보대사 스눕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인 인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것의 식재 연도는 무려 1884년인데, 그 거대한 나무 기둥 아래 서면 누구라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136년 동안 지치지 않고 묵묵히 인간사를 굽어본 나무에게 그 누가 어떤 잔말을 던질 수가 있을까.





물론 그 와중에 잔말이 아닌 짓궂은 행동으로 인간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다. 해당 플라타너스 나무 옆으로는 공원을 찾는 이들을 위한 체력 단련 기구가 죽 늘어서 있는데, 몇 주 전,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한창이던 때에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기구 사용 금지의 의미로 둘러놓은 접근 금지 테이프 안을 비집고 들어가 운동에 매진하고 계셨다. ‘기구 사용 금지’라는 테이프의 의미를 단박에 ‘운동 방해 금지’로 변환하는 선생님의 그 영리한 플레이에 나는 혀를 내둘렀고, 동시에 플라타너스 선생님의 눈치를 슬금 보았다. 이 정도 별꼴이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136세의 플라타너스 선생님은 내 눈치를 의식하시고도 물론 아무 말이 없으셨다.





요즘 나는 할 일이 없으면 집 밖으로 나가서 무작정 걷는다. 소란을 피우며 주목을 요하는 ‘핫 플레이스’에 물린 이들에게 ‘소박하게 동네 걷기’만큼 흥미로운 놀이도 없는 듯하다. 자차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놓칠 수밖에 없는 모든 숨은 것들을 눈에 담기 위해 애쓰면서 걸으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후딱 지나간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오래된 것들과 새롭게 마주하는 기쁨은 정말 괜찮다.



나는 꽤 마른 편이라서 먹고 바로 걷기보다는 먹고 좀 자면서 소가 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아무래도 합당할 텐데, 본디 소화 기관이 약한지라 먹고 바로 눕질 못하니 먹고 바로 걸을 수밖에 없다. 부모님은 이런 삶을 사는 나를 보고 ‘가지가지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손위 여성분께서는 이런 나를 두고 ‘너도 너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무튼 온전하진 못한 인생인데, 누가 뭐래도 걷는 건 정말 좋은 습관인 듯하다.



최근엔 주말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인천 근대 개항의 역사를 살뜰히 품은 인천역, 동인천역 주변을 배회하며 백수건달처럼 싸돌아다니는데,




그렇게 나는 인천 최초의 담배 회사가 <동양연초주식회사>였단 걸, 인천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 <대불호텔>이었단 걸, 우리나라 최초로 천문 관측을 했던 기상대가 <인천관측소>였단 걸 알게 되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미곡 거래소가 <인천미두취인소>였으며, <자유공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최초와 최고의 것들이 무성했던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그것들의 기운을 어디에다 갖다 버리고 안 흡수했는지 그 어떤 분야의 최초도, 최고도 되지 못하고 있는 나의 삶을 새롭게 곱씹으며 찐하게 채찍질하는 계기로 삼아 본다. 다만 나는 인천의 짠물만은 그 누구보다 찐하게 받아들인 모양인지 사람이 좀 짠하며 소금처럼 짜고 박한 듯한데, 이를 새로이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보기도 한다. 잘 좀 살자! 스눕피야.





길거리 안팎에서 늘 그러했던 것들을 새삼스럽게 까보고 감탄하며 공부하는 평온한 일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안전한 문화 강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요즘이다.



미국 힙합 음악을 들으며 슬랭을 공부하고, 요즘 유행하는 패션 브랜드의 아이템을 구경하고, 1920년대 미국 소설의 주인공의 삶에 몰입하는 것도 참 즐겁고 좋은 일이지만, 계속 그러다 보면 현실 감각을 잃어버릴까 봐 약간은 두려운 기분도 든다. 겉멋만 잔뜩 든 변변찮은 놈으로 보이는 건 정말 딱 질색이니까. 그래서 더 강박적으로 내가 나고 자란 곳을 탐닉하며 내가 현실적으로 도움 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또 단순한 관찰자 그 이상으로 함께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선택적 인천 홍보대사라는 포지션은 아무래도 짜치니까.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내가 쓴 어떤 ‘미국 힙합’ 관련 포스트에 이런 댓글이 하나 달렸었다.




"글쓴이야~ 밥은 먹고 다니냐?”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아서 더 부끄러웠다. 하지만 선생님, 이게 제 삶인 걸요. 저도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눈치 보지 않고 덕질할 자유가 있다구요! 참고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밥은 깨작깨작 먹습니다. 아무튼 대개 잘 먹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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