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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Jan 17. 2021

하루키 소설의 본보기가 된 피츠제럴드의 명품 단편

소설 '다시 찾은 바빌론(Babylon Revisited)'




나는 이 단편이 너무 좋았기에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
이 작품을 본보기로 삼았다.

-하루키 센세도 바빌론은 못 참지-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발표한 단편 <다시 찾은 바빌론>에 그의 삶을 정직하게 투영했다. 술에 곯아 망가진 인생, 유럽을 돌아다니며 물 쓰듯 돈 쓰던 흥청망청 방탕의 삶, 아내 그리고 처형과의 갈등까지. 소설 속 주인공, 35살의 아일랜드계 미남 ‘찰리’의 면면은 곧 작가 자신의 과거 라이프스타일을 곧게 비추었다.





악덕을 부추기고
낭비를 권하는 취향이라 해도
결국 아이들 장난과도 같다.

그는 '방탕'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때 퍼뜩 깨달았다.

희박한 공기처럼 사라져 없어지는 것,
유를 무로 만드는 것,
밤이 이슥한 시각에 술집 순례를 하며
2차, 3차 술을 마신다는 것은,
곧 인간의 몸이 큰 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동작을 점차 완만하게 하는
특권이 허용됨에 따라,
그 때문에 지불되는 금액이 점차
증대되어갈 뿐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마법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문장-





소설은 대공황 이후 ‘프랑스 파리’를 다시 찾은 35살 미국인 찰리의 ‘3일’을 보여준다(다큐 3일). 그는 유례없는 주식 호황기에 떼돈을 벌어 일을 관두고 파리에서 주색에 빠져 지냈는데, 이후 주식 폭락으로 빈털터리가 되었고, 아내도 잃었다. 하지만 찰리는 체코 프라하에서 현지 회사의 대리점을 맡아보며 다시 삶의 정상 궤도로 진입했고, 하루 딱 1잔의 술을 마시며 1년 반 이상 절제하는 삶을 사는 중인데, 평범한 일상과 따뜻한 가정의 회복을 꿈꾸며 파리를 찾아왔다.




몇 년 전에는 참으로 많이 드셨지요.

앞으론 술을 절제해 나갈 생각이야.
벌써 일 년 반 이상 절제하고 있거든.





아내가 죽고 법률상 후견인으로 처형에게 맡겨진 9살짜리 딸 ‘오노리아’를 되찾기 위해 다시 찾은 파리, 10개월 만에 재회한 9살짜리 딸은 여전히 귀엽고 그를 잘 따르지만, 3년 전 바보짓을 하며 돌아다니던 때의 모습과는 달리 성숙했다. 그는 딸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지만, 어찌 ‘사주는 것’ 외엔 방도가 없다.




어느덧 딸아이는
자기만의 행동 규범을 가진
인격체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찰리는
그 아이가 완전히 성인으로
굳어버리기 전에 약간이라도
자신의 존재를 그녀에게
각인해 두고 싶은 욕망에
점점 사로잡혔다.



찰리는 그의 처형 ‘마리온’과 동서 ‘링컨’에게 그가 파리에 온 목적을 밝힌다. 물론 그들도 짐작한다. 딸과 함께 프라하로 돌아가 함께 살겠다는 이야기. 하지만 처형 ‘마리온’은 냉담하다. 더욱이 그와 그녀는 첫 만남부터 엇갈렸고, 마리온에게 찰리는 증오와 악, 불신 그리고 경멸의 대상이었다.


과거의 호황기, 찰리는 돈을 잘 벌었고, 그것을 물 쓰듯이 썼으며, 술 먹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 삶의 정상 궤도로 진입한 현재도 그는 돈은 잘 벌며 순조로운 경제생활을 영위한다. 반면 마리온은 늘 쪼들리며 살았고, 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싫어했고, 그가 여동생을 죽게 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제부가 그런 모진 짓을 한
그날 밤부터 제부는
내게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건 어쩔 수가 없지요.
헬런은 내 혈육이니까요.




달라진 자신의 현재를 어필하며 딸과 함께 체코로 돌아가려는 찰리, 하지만 3년 전 그와 함께 술 퍼먹고 놀던 친구 둘이 과거의 망령처럼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 처형과 동서는 같은 부모로서 그를 이해하면서도 어찌 확신이 안 선다. 에휴, 찰리는 어찌 될 셈인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가요.
이곳의 당신 친척들은
걱정하지 않을 거예요.
틀림없이. 오랜만이잖아요.
 그렇게 근엄한 체하고 있어요?

그럴 수가 없어.
자네들 둘이서 식사를 하게.
나중에 전화를 하겠어.




<다시 찾은 바빌론>이 쓰이고 발표되던 해인 1930년과 1931년은 20대 중반부터 이어진 피츠제럴드의 유럽 여행(방종의 삶)이 끝난 시기이자 피츠제럴드의 와이프가 발작하고 또 회복하던 시기인데, 소설 속 찰리의 반성과 회개 그리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새롭게 꿈꾸는 장면엔 작가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교훈이 고스란히 녹아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피츠제럴드는 직접 체험에 기반해 이야기를 재가공 후 소설로 야무지게 빚어내는 종류의 작가였으니 말이다.


현재의 붕 뜨고 혼란스러운 사회적 분위기와 과열된 주식 시장(소설 속에서 찰리는 '공매' 때문에 큰 손해를 본 것으로 나온다) 등과 엮어 이 소설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찰리 사장님도 주식 폭락으로
상당히 손해를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내가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린 건
경기가 좋을 때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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