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브런치를 시작하다.
2018년 10월, 일을 관뒀다. 월 매출이 몇 억씩 나오는 백화점 스토어를 몇 개씩 관리하는 일이었다. 과자 몇 봉지 계산도 헷갈리는 내게 그것은 벅찬 일이었다. 솔직히 돈 욕심이 크게 없어서 동기들은 부족하다고 툴툴대는 연봉도 나는 만족스러웠다. 한 달에 좋아하는 브랜드의 옷 한 벌, 좋아하는 작가의 책 몇 권, 써브웨이 샌드위치, 맥도널드 햄버거를 돈 걱정 없이 사 먹을 수 있음에 그저 좋았다. 나름 저축도 했다. 하지만 오래 잘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빠르게 판단했다. 게임 아이템 구매하듯 클릭 몇 번으로 부족한 물건을 발주하면 다음 날 지하주차장에 그것들이 도착했다. 아침 일찍 출근한 물류팀이 박스를 매장에 풀어놓고, 오전조 매장 직원분들이 박스를 분해해 내용물을 진열하고 나면 나는 출근했다. 매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엑셀을 만지작거리다가 매장을 몇 번 둘러보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멍 때리기를 무한 반복하였다. 본사 임원들의 기습 방문에 잘 대비한다면 충분히 농땡이를 칠 수 있는 직무였다. 그런 이유로 그 일을 좋아하는 윗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맞지 않았다. 오래 잘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듭 판단했다. 그리고 퇴사 면담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2018년 10월, 퇴사와 함께 블로그 글쓰기를 시작했다. 전국의 퇴사생들이 모여 ‘불운’ 배틀을 벌인다는 전설의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입주한 것이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하지만 브런치의 국룰인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영 불편했다. 적어도 내게 작가님은 ‘스콧 피츠제럴드’나 ‘알베르 카뮈’, ‘생 텍쥐페리’, '김한길’, ‘김훈’ 정도는 되어야 했다. 나는 ‘선생님’이 더 좋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작가님’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분들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주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선순환, 줄여서 선순환 혹은 생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기 전에는 그들은 다만 하나의 '작가님'에 지나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광고를 전공했다. 사실 나는 광고 카피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증명할 거리가 부족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해 무얼 준비했느냐고 물어올 때마다 할 말이 궁색했고, 보여줄 글이 없었다.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고, 에디터가 되고 싶다는 사람이 글은 안 쓰고 주야장천 읽거나 듣기만 했으니까. 물론 글도 썼다. 하지만 그마저도 텀블러나 티스토리 같은 플랫폼에 비공개 글을 썼다 지우는 수준에 머물렀다. 2009년부터 거진 10년을 그랬다. ‘부끄러움’이 삶의 모토라도 된다는 듯이 숨어서만 글을 썼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빤히 예측 가능한 결과에 시선을 비껴온 나의 게으름 탓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인생은 딱히 샛길을 내어줄 마음도 없어 보였고, 막연히 품은 기대만큼 호락호락한 곳도 아니었다. 사회에서 잘 팔리려면 증명할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사회는 개인의 역사나 속마음이나 속사정, 속생각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다는 비밀을 혼자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쓸데없는 일들에 성실했고, 보여주는 일들에는 관심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십구 년을 헛발질했다.
2018년 10월, 별안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 블로그 글쓰기를 시작해 정확히 10년을 몰아붙여보자고. 뭐 하나를 끈질기게 좋아하고 쉽게 싫증을 내지 않는 나의 강점을 살려보자고. 10년이 지나도 서른아홉 살이라니,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이제는 정말이지 글쓰기로 나를 증명하고 싶어 졌다. 취미로 머물러도 좋았다. 직업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예전에 다짜고짜 출판사에 연락하여 이메일 주소를 얻어내 약속을 잡고 만난 전직 남성 잡지 편집장님께서 내게 이런 조언을 해주었고, 나는 그것을 아직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편집장 님, 우르오스 로션 세트 선물한 백수 기억하시죠?)
글은 취미로 쓰면 되는 거죠.
그게 더 행복할지도 몰라요.
카피라이터 준비생 님으로부터 받은 개인 카톡, 내가 포스팅을 마치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와 늘 ‘좋아요’를 눌러주시던 구독자 님, 유명 패션 잡지 편집장 님의 블로그 구독, 평소 온라인을 통한 만남을 꺼려했지만 실제로 보고 싶어 연락해보긴 처음이라면서 첫 만남부터 진지한 대화를 이어나갔던 아이스크림 가게 대표님, 힙합 관련 유튜브 콘텐츠에 출연 요청을 해주신 담당자님, 내 글을 널리 퍼트려준 인터넷 신문의 에디터님까지.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다른 할 말이 없다. 내 글이 뭐라고 이렇게 좋은 분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건지. 이외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정말 많았기에 일일이 열거하진 못하겠으나 약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블로그 글쓰기’는 정말이지 ‘내 인생’을 바꿨다. 모두 좋은 쪽으로만! 이건 정말 쭉정이 같은 내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칙’ 혹은 ‘사기’라고 생각한다. 흐흐, 착하게 잘 살아야지.
대학을 졸업하고 ‘카피라이터’ 직무 면접을 보기 위해 압구정에 위치한 아주 작은 광고대행사 사무실에 들어갔다. 슬리퍼를 신고 나온 남자 직원 한 분이 ‘저기’ 앉아서 기다리라며 구석의 소파 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곧이어 ‘대표’라는 사람이 등장했고, 나는 회의실로 들어가 그와 1:1 면접을 보았다.
대표는 커다란 모니터 위에 내 자기소개서 파일을 연결해 박제해놓고 글을 여러 차례 품평하더니, 이제는 자기에게 내가 쓴 자기소개서를 잘 설명해보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설명을 시작했다. 30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대표가 그의 중지로 책상을 세게 두들기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뽑는 사람인데,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지, 왜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느냐고. 나름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면접을 보고 나와 처음으로 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내가 드렁큰 타이거는 아니지만 나는 남자기 때문이었고, 인천으로 내려가 맛있는 초밥을 먹을 생각에 흥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는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서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눈치 없이 떠들어도 이 세상의 어딘가엔 내 이야기를 아무런 편견 없이 들어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7년 반 남았다. ‘덕질’과 관련한 나의 포스팅에서 몇 번이나 언급했듯이 나는 싫증을 잘 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끝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파고드는 사람인 것이다. 승부욕이나 정복욕은 조금 떨어져도 끈기 하나만큼은 끝내준다고 자평한다. 앞으로 7년 반 남았다. 블로그 글쓰기는 앞으로도 내 인생을 매일 새롭게 바꿀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nK4RARPXnM
* 프런트 이미지 출처: N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