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눕피 May 02. 2021

대학, 추억 그리고 후배

다시 돌아온 스눕피의 감성 에세이




12년 전, 대학 합격 통보를 받고 오리엔테이션 참석을 위해 모교에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래서 대학교를 싸고돌던 공기와 냄새, 대학교의 사람과 시설, 불빛 그 모든 것들이 나를 긴장하게 했고 또 들뜨게 했다.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해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지겹고 재미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중앙도서관의 그 많던 책들도, 늘 늠름하게 서 있던 코끼리 동상도, 물감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던 미술대학의 학생들도, 롱 패딩에 추리닝 바지를 입고 화장실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연극영화과 학생들도, 새삼스레 꺼내 들어 멍하니 쳐다보곤 하던 대학교 학생증의 빤질거림도 더는 새롭지 않았다. 그것은 내 지루한 일상의 한 단면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그곳에 방문할 때면 너무나 익숙하여 되려 진부하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또 한 번 낯설게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대학에 처음 입학하던 때에 느끼던 낯선 감정과는 다른 차원으로 펼쳐진다. 긴장과 들뜸보다는 역시나 평온하고 여전히 무사한 많은 것들이 내게 주는 고맙고 놀라운 감동 체험이랄까.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마주하는 모든 상황과 상태 그리고 사건과 사고는 낯섦과 익숙함 그리고 또 다른 낯섦의 감정을 반복하는 '밀당'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기도 완전하게 편안하거나 불안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제 친한 후배와 몇 년 만에 만나 오랜만에 모교에 들렀다. 이 뜻깊은 날을 더욱 기분 좋게 만들어주려는 듯이 공기는 대단히 맑고 상쾌했다. 회포를 풀며 대학교 주변 골목골목을 거닐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그래서 우리는 한 고깃집에 들어갔다. 그곳은 초벌구이집이었는데, 사장님이 바깥에서 토치로 고기의 겉면을 화끈하게 지져주시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안 들어가곤 못 참겠다는 판단이 섰다. 우리는 오겹살 2인분에 간장 불고기 2인분, 맥주(테라) 2병, 피자 치즈가 들어간 볶음밥 2인분을 주문해 가볍게 때려눕혔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왔는데 동생이 나한테 그랬다. "형, 덕분에 진짜 잘 먹었어. 맨날 학식만 먹다가 오랜만에 맛있게 먹었다." 31살 늦깎이 대학원생의 이토록 따뜻하고 감사한 말을 들으니 내가 다 머쓱해졌다. 너처럼 착한 동생에겐 더 비싸고 좋은 것도 사줄 수 있는데 말이지. "나도 덕분에 잘 먹었다!" "형, 모나카 아이스크림 빨러 가자! 내가 살게." "됐어, 어차피 내년 2월에 졸업한다며 그때 취업해서 사주면 되지." "박사 학위도 딸 듯?" "미친 새끼, 이거 고단수네. 노렸냐?" 그러자 동생은 바보 같이 웃었다.



밥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동생과 함께 대학 캠퍼스를 거니는데, 여러 명의 대학생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대학 시절의 추억을 쌓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기 바빴는데, 오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약속을 잡고 만난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들은 스마트폰 카메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멀리서부터 끼쳐 와 그 최초의 힘을 다하고 스러지는 잔디밭 스프링클러의 잘은 물방울처럼 비가 어중간하게 내려 쌀쌀하고 쾌청한 날씨에 약간의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역사를 전공하고 '옛 것'에 대한 그리움과 낭만을 품고 사는 후배는 역덕(역사 덕후)스러운 갖가지 썰들을 계속 쏟아냈고 나는 너무 흥미로워서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걸었다. 학교를 한 바퀴 돌고 한참 아래로 내려와 아무도 없이 고요한 수표교 위에서 드라마 '야인시대' 얘기를 하면서 킥킥대다가(언제적 드라마)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 후배가 카톡을 하나 보내왔다. 대학 건물 화장실 소변기 위에 붙어 있던 '마음 산책'이었다. 웃자고 보내온 메시지인데 혼자 진지해져 버려서 지하철 문에 등을 기댄 채 한참을 읽어보았다. 하지만 진지하지 않은 척 'ㅋㅋㅋㅋ'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가난과 괴로움의 바다가
아무리 크고 넓어 두려울지라도
보시 공덕을 쌓은 사람만은 무사히
그 바다를 건너게 되느니라.




오래간만에 마친 캠퍼스 투어는 낯설지만 익숙했고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만은 분명히 들었다. 소중하게 추억할 시절이 있고, 그것을 함께 나눌 귀중한 사람이 곁에 있으니 나는 분명 행복한 삶을 잘 살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불교 서적이 읽고 싶어 져서 책 한 권을 주문했다. 요즘엔 통 책을 안 읽어서, 아니, 못 읽어서 걱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싫은 소리를 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