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눕피 Dec 12. 2021

희망하기에 절망하지만 희망하니까 나아가는 게 삶이다.

<먼 훗날 우리> 후기, 영화 감상은 잘 쓰지 않지만, 가끔은 씁니다.



너무나 피아노를 가지고 싶어 하던 5살 소녀의 언덕배기 집 앞에 어느 날 ‘중고 피아노’를 실은 트럭 한 대가 멈춰 섰다. 가난한 아빠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소녀는 뛸 듯이 기뻤다. 시간이 지나도 소녀는 그날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생의 가장 인상적인 사건으로 그것을 마음속에 아로새겼다. 소녀는 아빠가 선물한 ‘중고 피아노’를 통해 ‘소중함’에 대한 감각을 가장 감동적으로 학습했다. 시간이 흘러 소녀는 딸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딸아이의 다섯 번째 생일 전날 밤,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의 머리맡에 아이가 평소 가장 가지고 싶어 하던 인형을 놓아두고 방문을 빠져나왔다. 엄마는 늘 생각해왔다. 만일 자신의 아빠가 그때 그 시절을 놓치고 훗날 피아노 100대를 그녀에게 사다 주었어도 그날의 감격을 결코 뛰어넘진 못했을 거라고. 엄마는 자주 다짐해왔다. 소중한 것은 그때의 감정과 감각일 뿐이며, 때를 놓친 소중함이란 ‘말’이 될 수 없는 ‘말’이라고.


- 내 머릿속에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 내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새롭게 피어오른다. 그래서 중간에 잠깐 덮어놓고 생각을 정리하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새로운 이야기를 나름대로 이리저리 전개해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아니면 비교할 만한 레퍼런스를 찾아 이곳저곳 붙여 연결해보는 것도 즐긴다. 그것이 책이 됐든 영화가 됐든 노래가 됐든 말이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면 그곳이 영화관이 아닌 한 그것을 한 번에 쭉 이어 보는 경우가 흔치 않다.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 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중략)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공포로 미루어보아 거기에 최악의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한 내일을.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중에서


영화 <먼 훗날 우리>는 인간은 함부로 희망하기에 자주 절망스럽지만 반대로 희망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매우 서정적으로 풀어낸 사랑 영화다. 각자의 꿈과 성공을 위해 촌구석에서 ‘베이징’으로 넘어와 지지리 고생하며 고군분투하는 영화 속 두 남녀 주인공은 그들의 연인 관계가 영원히 무탈하길 바라며 함부로 희망한다.


“우리는 우여곡절이 없으면 좋겠다.”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혹시라도 우리가 헤어지면 죽을 때까지 보지 말자.”


연인이 되기 전, 능력 있는 남자 여럿 만나 팔자 한번 펴보려던 여자 주인공을 지켜보던 남자 주인공이 묻는다.


“저 사람이 하늘에서 별도 따 주고 바다에서 진주라도 캐다 준대?”

“그 사람이 집도 사준대? 내가 베이징에 집 여덟 채 사서 하나 너 줄게.”


연인이 된 이후, 이제 둘은 함께니까 돈도 결혼도 집도, 너의 성공도 상관없어졌다는 여 주인공에게 남자 주인공은 버럭 화를 낸다. 네가 원하는 삶이 그게 아니었느냐고, 이젠 나를 무시하느냐고.


성공을 열렬히 바라는 남자에겐 언제나 어떤 명분이 필요하고, 통속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그것은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한 발악으로 자주 비춰지며, 그것은 곧 그녀의 욕망을 대신 ‘희망’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 전통에 따르면 그녀는 결국 그와 멀어지게 된다. 역설적으로 그가 성공에 가까워지면서 '나'와는 멀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녀는 엉뚱한 걸 좇고 있었던 셈이고, 그 엉뚱한 걸 좇고 있는 그녀를 좇고 있던 그 남자야말로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걸 관통하는 키워드는 결국 ‘타이밍(때)’이다.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봐."
"그게 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핑계 대지 말고 진짜로 네가 원하는 걸 생각해 보라고!"


영화 속에서 남자 주인공은 결국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바라 왔던 소기의 인생 목표 하나를 달성한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꿈을 제대로 '희망'하며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지하철을 타고 떠나가는 그녀를 붙잡지 않은 것은 자신의 꿈을 희망하며 선택한 인생의 타이밍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이 닫히기 전, 손 한 번, 발 한 번 뻗고 디디면 너무나도 쉽게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때를 놓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 아닐까.


영화 < 훗날 우리> 이별한  남녀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의 재회를 교차해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밌는 포인트가 하나 있다.  남녀 주인공의 과거 장면은 그토록 선명한데 반해 그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현재는 아무런 힘이 없는 무채색 세상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온통 회색빛인 세상에서 그들은 과거의 우리가 이랬다면, 저랬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며 울고 웃는다. 하지만 이제와 변할  있는   하나도 없다. 서로를 놓치고  커버린 그들이 그리워하는  과거의 덧없이 얄궂던 그들의 아이 같은 희망일 뿐이니까. 그들은 '희망'했기 때문에 절망했다. 하지만 그토록 희망했기 때문에 선명한 과거나마 회상하는 배부른 회색빛 세상 속에서   있게 되기도  것이다.


어제 늦은 새벽에 영화를 보고 자서 그런지 영화의 여운이 남아있다. 이 여운이 곧 가시기 전에 마음의 기록을 남기려 씻고 나오자마자 이 글을 일필휘지로 휘갈겨본다. 이 영화가 궁금해져서 이제 막 찾아보려는 사람보다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타인의 다른 해석이 궁금한 사람을 위해 이 글을 썼다. 그래서 스포일링을 안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기도 했다. 아무튼 래퍼 Russ의 <NEED A MINUTE>을 반복 재생해놓고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노래의 무드 때문인지 글의 중심이 남자 주인공 쪽으로 쏠려버린 것 같기도 하다. 흠, 좋은 영화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가 알아보기 편하게끔 표시를 잔뜩 해두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