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장엄하게 기록해보자.
나는 사회생활을 남들보다 늦게 시작해서 꽤나 빌빌거린 편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되게 재밌게 놀았다거나 혹은 멋있게 자유 시간을 즐긴 것도 아니었고, 그저 좋아하는 책이나 음악, 매거진을 혼자서 들입다 파느라 쓸데없이 바쁘기만 했다. 당시를 돌아보면 마음 한 편이 참 무거우면서도 또 반대로 너무나 행복했던 시간이었는데, 이 양가감정은 비슷한 상황을 직접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무척 공감할 것이다. 아무튼 당시에는 나보다 빨리 취업해서 현실과 분투하는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은 대체 무얼 위해 저렇게 핏대를 세우나 싶었지만 내게도 곧 닥칠 일이라고 생각하며 서툴게 감정 이입하곤 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적 눈치나 타이틀 등 뭐 그 어떤 조건을 대입해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웬만하면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하는 게 늦게 시작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내지는 천 배 더 낫다. 현재 내 나이가 서른셋인데, 만약 나보다 한 열 살 어린 친구가 '이제 곧 대학을 졸업하는데 빨리 일을 시작할까요, 아니면 조금 더 인생을 즐기며 놀까요?'라고 물어온다면, 그리고 그때 내 정신이 맨 정신이라면 '딱히 할 일이 없다면 빨리 일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느냐'라며 조심스럽게 권해볼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술을 몇 잔 걸쳐 약간 취기가 돌고 알딸딸한 상태라면 저것과는 반대로 나는 이야기할 것이다. 은퇴 후 재취업을 이야기하는 100세 시대에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무한하게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자연인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을 깊이 파볼 수 있는 시간, 세상 참 황홀한 삽질의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아느냐고! 그때의 내가 꾸역꾸역 머릿속과 마음속에 집어넣은 잡다한 지식과 소식 그리고 이야기들이 나의 긴 인생길을 롱런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너무나 든든하다고! 더불어 이건 언뜻 내 생의 태도가 다소 패배주의적으로 비치거나 철없이 나이를 까먹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꼴이 되어 나 홀로 속삭이고 말겠지만, 뭐랄까 큰 기대가 없기에 별로 실망할 것도 없다는 삶의 자세나 당장 조급하게 군다고 달라질 것이 하나 없다는 어떤 체념적인 생각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라는 것.
내가 좋아하는 패션 디자이너 중에 '비앙카 선더스'라는 영국 여성 디자이너가 있는데, 그녀가 인터뷰에서 자신의 디자인 작업과 관련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의 관점과 이야기를 장엄하게 기록해가는 일이라고 말이다. 정말 멋지지 않나?
그래, 남들보다 조금 늦으면 어떠냔 생각을 해본다. 대신 나의 생각과 관점을 다듬고 모아 장엄하게 기록해보면 되지. 늦은 시작 때문에 고민이 무척 많은 인생 후배가 이 글을 우연히 보고 잠시나마 힘 좀 낸다면 참 좋겠다. 내 나이 서른셋, 멋진 차를 타지도, 멋집 집에 살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매일 웃으며 즐겁게 삽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컬렉션 영상 하나 보고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