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동 벼룩시장과 동묘 구제시장은 체험 삶의 현장이다.
특정 취향에 중독되는 건 밤사이 소리 없이 내린 눈이 두껍게 쌓이듯이 나도 모르는 새 어찌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지는 일이기에 다달이 보고 듣는 걸 의식적이고도 의도적으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곤 한다.
특히 취향은 그것의 사전적인 정의처럼 마음이나 욕구가 가리키는 방향이다. 그래서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인간을 둘러싼 현재의 환경은 곧 취향으로 굳어질 수 있다.
그래서 공대 출신의 개발자가 많고, 크고 작은 의사결정의 덩어리가 그저 몇 자리 숫자로 왔다 갔다 하며 일희일비하는 환경 속에서 밥벌이를 하는 나는 이렇듯 다소 투박한 환경 속이지만 타고난 예민함을 보호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잠시 삐걱거리던 회사는 방향타를 돌려 이내 순항하고 그 안에서 나도 인정받고 있지만 즐겁고 슬기로운 이중생활을 위해 여기에선 부러 나의 본캐를 밝히고 싶진 않다. 스트라이크 존을 좁혀놓고 몰빵을 지향하던 삶에 된통 혼나 봤기에 33살의 나는 기왕이면 가능성의 게임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자, 각설하고!
연애도 안(→못) 하고, 혼자 사는 내향형(I) 인재(→바보), 특히 30대 초반(→중반) 남성에게 주말이란 무한한 선택지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선택지가 무한할 뿐 환영하는 곳은 극히 유한하다. 그래서 나는 주말 이틀 중 하루, 그중 서너 시간을 황학동 벼룩시장과 동묘 구제시장에서 보낸다.
평균 연령을 낮추는 자의 생기로움(아직 어린 나이라며 자위하기), 브랜드의 가치를 모르는(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마음 착한 주인장과 브랜드의 가치를 너무 잘 알아 가끔 피곤한 자의 숨 막히는 두뇌 싸움, 풀풀 날리는 먼지와 나비처럼 날아 마스크를 뚫고 벌처럼 코를 쏘는 곰팡이 내음, 수많은 인파를 이리저리 뚫고 걸으며 퍼뜩 깨닫는 생활의 개념, 디지털 숫자 놀음에서 벗어나 현금을 주고받으며 느끼는 노동의 숭고한 가치, 천 원짜리 몇 장에 그지없이 행복했던 어린 날의 순수함에 대한 새삼스러운 되새김질, 너무 편하게 대충 막 입고 가면 타짜 같을까 봐 나름 신중을 기해 골라 입은 적정 수준의 패션(자의식 과잉), 예를 들면, 나파피리X마틴 로즈 재킷과 팜 엔젤스의 트랙 팬츠 그리고 미즈노 러닝화의 쿨한 조합(덧없는 해석), 하지만 이토록 자유로운 착각도 잠시, 이 모자는 얼마냐고 물어오는 아주머니로부터 구제 시장통의 명예 시민권을 부여받은 나의 모습은 사실 영락없는 토박이 아재였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도 손님인 걸요?
구제 시장에서 서너 시간 떼꾼하게 놀고 집으로 돌아오면 도서관에서 책 수십 권 읽고 돌아온듯한 뿌듯함이 느껴져서 좋다. 그곳은 한때 세상을 주름잡았던(혹은 그러려다 실패했던) 위대한 레퍼런스들로 가득하기에 그렇다.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몰리 고다드 Molly Goddard는 다음 시즌을 준비하면서 무작정 도서관에 들러 무작위로 책을 뽑아 든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실린 인물의 패션과 역사 등을 정리하며 수집한다고 한다. 자기 브랜드를 운영하는 그녀가 딱히 이직할 일은 없을테니 다른 의미에서의 레퍼런스 체크인 셈이다. 또한 런던의 포토벨로 빈티지 마켓 인근에서 성장한 환경 때문인지 시간이 나면 여러 빈티지 샵에 들러 옛날 옷들을 구경하며 논단다. 또 개인적인 스타일링에 있어서도 빈티지를 섞어 입는 것을 즐긴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요새 잘 나간다는 디자이너들이 거진 다 앞보다는 뒤를 돌아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몰리 고다드의 인터뷰 중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녀의 '이상함'에 대한 강박이었는데, 뭘 하더라도(아무래도 디자인이겠죠?) 그것이 좀 이상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는 부분이었다. 슈퍼 크리에이티브의 원천이란 역시 무언가에 대한 온순한 집착인 것일까. 그것이 비록 '이상함'이라는 감각에 대한 집착일지라도 말이다.
디자이너 몰리 고다드의 인터뷰를 읽다가 도서관에 가고 싶어졌다. 빚진 게 참 많은 곳인데 잊고 살고 있다. 벼룩시장에 가는 시간을 줄이고 도서관을 좀 다녀볼까 한다. 꽤나 정신없고 시끄러운 곳에서 지나치게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보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극단적일까? 독거 노총각이라는 유튜버 분이 있던데, 이대로 가다가는 나의 채널 개설 시간도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주변에 말한다. 나는 다만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가득한 곳이나 좋아하면서 힙하고 핫한 곳은 찾아다니지 않고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나의 주말, 이대로 괜찮을까? 아무튼 독거 스눕피 어서 오고!
"글을 접으며"
너무나 안타깝고 대단히 슬픈 일주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관련 내용을 블로그엔 담진 않으려고 합니다.
관련한 말이 너무 많은 듯하여 걱정도 됩니다.
다만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