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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Jan 05. 2023

사회안전지수 174위

내 고향 '인천 미추홀구', 내가 많이 아껴요.



174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거진 30년을 넘게 살았다. 며칠 전 공개한 '2023 사회안전지수’에서 무려 178위를 기록한 곳이다. 전국 184개 시·군·구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니까 뒤에서 7번째를 기록한 도시에서 나는 나고 자란 것이다. 조사를 공동 진행한 언론과 각종 연구소는 경제활동과 생활안전, 건강보건, 주거환경 등 크게 4개 차원의 정량지표와 주민 설문조사 결과인 정성지표를 함께 감안해 도시의 순위를 매겼다고 했다.


서울특별시 광진구의 한 원룸으로 이사 왔지만, 나의 영원한 고향 ‘미추홀구’가 영락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며 기분이 영 언짢았다. 언제부터 그리도 애향심이 있었는지 자조하면서 말이다.




I'm driving   따라
 사는 동네 말이야
몇만 번이나 지나
왔다 갔다 했던
how can I forget
those days we spent




집창촌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친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교 바로 앞에서 버젓이 화려한 불을 밝히며 시선을 빼앗던 집창촌 골목을 지나다녔다. 그땐 영업시간 전이라면 누구라도 그 거리를 지나갈 수 있었다. 아빠 차의 뒷좌석에 앉아 그곳을 지나는 밤이면 나는 그곳의 또 다른 세상이 궁금해 흘깃흘깃 눈알을 빠르게 돌렸다. 그리고 그 앞에서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기를 바라기도 했다. 낮 시간에는 자세히 볼 수 없는 그곳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곳을 지날 때면 지금보다 더 젊었던 우리 엄마와 아빠는 공연히 헛기침을 하였다.




always wide opened like 24/7
remember our heaven




맨날 맞짱


언덕배기에 위치한 중학교 주변의 골목길을 친구들과 함께 어슬렁거리던 2003년의 어느 날, 깔깔거리며 모퉁이를 하나 돌았는데 친구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선배 하나가 신발주머니를 들고 우리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주먹을 쓴 형과 따까리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중 한 명이 내 반스 바둑판 신발(체커보드)을 보고 물었다. 그거 약탱(짭탱)이냐? 아뇨, 진짠데요! 라고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들은 저 멀리 빠르게 사라졌다.





일 년이 가고 또 시간이 가도
I still remember
we broke up in september
계속 생각이 나 밤엔 잠도 안 와





달동네


내가 중학교 2학년 생이던 2004년, 하굣길의 ‘달동네’에서 그곳에 사는 친구를 놀리는 나의 불알친구들을 나는 말리지 못하고 방관했다. 나의 친구들은 당시 슈퍼마켓에서 가장 싼 값에 팔던 ‘샴푸’의 이름을 그 친구의 별명이랍시고 자꾸 불러댔다. 늘 비듬이 껴 있던 친구에게 좀 씻으라는 의미를 담았었다. 가뜩이나 아픈 곳을 쿡쿡 찌르며 놀리던 우리를 보고 그 친구는 얼마나 화가 나고 가슴이 아팠을까. 어린 시절의 내가 부끄럽다.





너 없이 지낸 게 신기해
내 맘 이런데 왜 이렇게
멀어져야 해 yeah





김밥


고등학교 1학년이 된 2006년, 토요일 ‘가정’ 수업에서 ‘김밥 만들기’ 실습을 했다. 몇 명이 하나의 조를 이뤄 각자 재료를 나눠 가지고 와서 특별한 김밥을 함께 만들어 먹어보자는 취지였다. 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친구 하나는 사람을 대하는 법이 서투르고 말이 어눌해 늘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는데, 같은 조를 이룬 친구들이 그 친구에게 모든 재료를 다 싸오라고 짓궂게 시켰다. 실습이 있던 날에 교실 뒷문으로 친구의 할머니가 김밥 재료와 밥을 잔뜩 싸들고 들어왔다. 진짜 미안하고 죄송하긴 한 건지 미안한 척 혹은 진짜 죄송스러워서 할머니의 김밥 재료를 조용히 받아 든 친구들은 친구의 할머니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술과 이빨


다시 중학교 2학년 때 ‘옷’을 좋아하고 ‘힙합 음악’을 좋아해 급속히 친해진 친구가 하나 있었다. 지지리도 공부를 안 하고 말썽을 피우던 그 친구가 어느 날인가 우리 집에 놀러 와 우리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같이 게임을 하고 헤어졌다. 며칠 후의 방과 후, 백화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너네 집에 놀러 갔을 때 따뜻한 가족의 기분을 느꼈다고 말이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그 친구는 더는 학교를 못 다니겠다면서 자퇴했다. 이후 안 좋은 소식을 몇 번인가 전해 들었는데, 몇 년 전인가 지역의 경찰관이 된 친구가 어느 날 술에 절어 이빨이 다 빠진 남자 하나가 와이프를 폭행해 왔는데, 그 친구가 ‘그 친구’였다고 말했다. 알아볼 수가 없이 그놈이 엄청 많이 변했다면서 친구는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그 친구’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참으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cell phone number
예전 번호만 눌러
네가 좋아했던 노래
혼자 불러보네 JTKEnJOE





그 정돈 아니야


사회에서 만난 어떤 동생 하나는 가끔씩 ‘미추홀구’와 관련한 사건과 사고 기사를 캡처해 보내주면서 내게 ‘지정 생존자’라고 놀리는데, 지역의 이미지가 어쩌자고 이렇게 된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한 번만이라도 널 보고
떠나고 싶은데
일 년이 가고 또 시간이 가도





그래도 즐겁게


솔직히 말해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저리 밝혔듯이 그리 유쾌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참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며 나름대로 즐겁게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고3 때만 해도 수능이 다가와도 공부는 조금도 하지 않고 수업 시간에 정도를 모르고 떠들던 친구들의 고집 때문에 눈물을 펑펑 흘린 여자 선생님이 계셨고, 반 대항 축구 경기를 한답시고 수능 시험을 얼마 남기지 않은 애들이 떼거지로 운동장에 몰려 나가 예비 ‘축구 선수’와 예비 ‘축구 광팬’처럼 굴기도 하였다. 명색이 고등학교 3학년인데 학급이 좀체 공부를 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반대로 공부를 하면 공부를 안 하는 친구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너 공부해? 배신이야!), 야자(야간자율학습)를 째고(빼고) 냉면을 먹고 놀거나(냉면 먹기가 유행이었다) 문학구장에 가서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야구팀 ‘SK 와이번스’를 응원해야 쿨한 학생처럼 비쳤다. 이런 참!





긴 인생에서 어떻게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 있다.
그럴 때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걸어가라.

- 김성근





그냥 솔직하게


과거를 회상하며 쭉쭉 이 글을 써 내려가는데 이걸 뭐 자랑이라고 적고 있나 싶어 현타가 왔고, 도리어 미추홀구의 안 좋은 면을 더욱 부각하며 ‘2024 사회안전지수’에서 나의 고향이 180위권으로 내려가도록 적극 돕는 미천한 에세이나마 될까 아주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자의식 과잉). 하지만 서른 중반 남자의 머릿속을 장악한 학창 시절의 인상적인 기억이라는 것이 사실 뭐 역시 저런 것들 뿐이라서 나는 그저 솔직해지고 싶었다.


블로그 포스트를 통해 몇 번이나 밝힌 바 있고, 사실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지만, 특별히 내게 그리 좋지 않은 기억으로 가득한 시기가 2003년부터 3년 간 이어진 나의 중학 시절인데, 그때가 미국 힙합 음악에 내가 본격적으로 빠져들며 90년대 초중반의 미국 힙합 명반을 사모으던 때이다. 게토, 게토, 게토! 어쩐지 그때 듣던 힙합이 그리도 맛있더라.


하지만 아무리 누가 뭐래도 저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아낍니다.

뉴진스의 막내 '혜인' 님을 배출하고, 자의식 과잉 블로거 '스눕피'를 배출했거든요. 촤하하하!





[중간에 계속 인용한 노래 가사는]

https://youtu.be/6jBWY7bByfA

대한민국 최고의 소울 뮤직, 슈퍼프릭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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