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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Mar 02. 2023

1998년의 컴퓨터 학원

그리고 패션 브랜드 'C0D3' 또는 'CODE'




1998년


98년도에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투박하지만 널찍한 공간에 구획 몇 개를 만들어 놓고, 플로피 디스크를 삽입하는 똥컴들이 줄지어 있던 신세계 같은 곳이었다. 도끼다시 바닥은 늘 번들거렸고 주인 없는 원장실은 원인 없이 넓었다. 나는 아빠 지갑을 열어 몇 만 원인가를 꺼내어 수강비를 마련했고, 그곳에서 MS-DOS를 배우고, Windows 95 따위를 익혔다.







한심한 기억력


하지만 이제 와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며 뚜렷이 기억에 남는 것을 정리해 보니 남자 강사님께서 우리에게 “ASDF 자판 위에 소지부터 검지까지 왼손가락 네 개를 나란히 올리고, G와 H는 건너뛰고, 마찬가지로 다시 J부터 오른손 검지와 그 이하 손가락을 쭉 올려둬야 한다”며 친절히 일러준 키보드 활용법의 기초나 아래아 한글에서 아래아 글자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ㅏ(K) 자판을 두 번 누르면 된다”는 것과 같은 무의미한 잔기술 혹은 마우스 볼을 집에 가져가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며 연신 쓸어 올리던 5:5 가르마 헤어 스타일 정도가 구체화되는 것의 전부라고 고백하려니 부끄럽다.


나는 대체 약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배운 것일까?






놀람


최근에 나는 요즘 어린 친구들이 컴퓨터 문서 프로그램의 ‘저장하기’ 버튼의 아이콘이 왜 그 모양으로 생겨 먹은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칸초처럼 귀여운 마우스 볼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역사를 전혀 모르고 이 세계를 무리 없이 잘 살아내고 있다는 현실을 알고는 적잖이 놀랐다.







So what?


물론 컴퓨터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그 시절을 통과한 이라면 그 누구라도 플로피 디스크와 마우스 볼의 정체를 알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심지어 그것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어디에 딱히 드러낼만한 자랑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이 글의 방향성을 급히 수정해야 했지만 말이다(늘 산으로 가는 내 글).


자, 다시 한번 반복하건대 나는 대체 약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컴퓨터 학원에서 무엇을 보고 배운 것일까?






C0D3


C0D3(CODE)라는 신진 패션 브랜드의 웹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나는 우연히 그들이 발매한 D15C PUFF3R(DISC PUFFER) 재킷을 보게 되었고, 홀린 듯이 과거에 젖었다. 그래서 애꿎은 컴퓨터 학원을 소환해 애잔한 추억 팔이를 하고 있다.



c0d3d.com



So why?


그들은 삐삐 시절의 숫자 암호나 가끔 눈물을 흘린다던 싸이월드 시절의 채연 누나가 보여준 텍스트 크리에이티브를 흉내 내는 네티즌들마냥 영문을 숫자로 변환하는 정신 사나운 브랜딩을 선보이며 옷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꽤 유니크한 접근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컨대 LIME SUIT를 L1M3 5U17으로 표기하거나 PIN DENIM을 P1N D3N1M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ㄴr... ㄴr는 묻고 싶ㄷr...

대체 왜 그렇게 표현하는 거야?



c0d3d.com



하지만 짜증 나게 쓰인 그들의 상품명을 이해하기 위해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며 '이렇게 읽는 게 맞나?' 애쓰는 나는 그들의 전술에 결국 흔들린 셈이 됐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들을 홍보하고 있다.




That's why


군 시절, 하염없이 바스러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택한 것이 소설을 필사하거나 굴러다니는 잡지를 닥치는 대로 읽거나 영영 사전을 들춰보는 일이었다.


그때의 교훈(?) 때문인지 요샌 틈만 나면 구글 위에서 새로운 패션 브랜드를 탐색하면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려는 시간을 붙들며 가까스로 두 눈에 최대한 많은 텍스트를 담아 머릿속 창고에 되는대로 툭툭 던져 놓는다. 이 때문인지 영어로 된 매거진 위에서 죽치고 살게 된 서른 이후엔 내 인생의 영어 실력이 나름대로 정점을 향해 나아감을 실감한다.


(기약 없는) 미래의 아들아, 영어 공부는 학습지 위가 아닌 구글 위에서 하렴!



미래의 아들아, 넌 정답에게 정답을 물어보니?



방과  시간   제대로 때워보겠다며 컴퓨터 학원에 등록한 98년도의 ,  2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배웠던 건지 마지막 문단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깨닫게 되었다. 죽어가는 시간의 무서움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그때의 내가 용케도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앞으로도 차곡차곡, 더 잘 살자!



[그리고 오늘의 추천 힙합]

휴스턴의 대표 래퍼는 '트래비스 스캇'이 아니라 '릴 키키'다. 가끔은 구글도 실수를 한다. '케케'가 아니라 '키키'다. 아무튼 98년에 발매한 릴 키키의 앨범을 하나 소개한다.



[열심히 썼는데 조회수 개망한 오늘의 추천 포스트]

https://brunch.co.kr/@0to1hunnit/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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