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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Jan 12. 2024

2024년은 RZA처럼

샘플링과 개성 그리고 태도



RZA 2024


인천 신세계백화점 지하 1층, 신나라레코드의 쪽문을 열고 작은 음악 감상 코너를 지나 구석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벽면 한쪽에 미국의 힙합 음반이 가득했다. 2003년의 일이다.





이후 나의 놀이터가 된 그곳에서 내가 처음으로 산 앨범은, 이 블로그에서 몇 번인가 언급했고, 지금 한번 더 반복할 것이지만, 미국의 힙합 그룹 우탱 클랜의 전설적인 데뷔작 <ENTER THE WU-TANG (36 CHAMBERS)>(1993) 미국반 CD였다.





선율적 감동 정도면 충분히 만족했을 막귀 중학생에게 우연처럼 찾아온 우탱 클랜의 거친 사운드와 투박한 연출은 상상 가능한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는 일대 사건이었다.





악바리 같은 아홉 청년의 모진 떼창은 아프니까 청춘 같았고, 비명처럼 반복되는 칼 소리, 빗소리, 부딪히고 터지고 찢기고 질질 끌리는듯한 이상야릇한 소리는 버겁지만 즐거웠다.



RZA



변함없고 변함없을 나의 자랑스러운 인생 앨범 <ENTER THE WU-TANG (36 CHAMBERS)>(1993)의 제작을 총괄한 인물은 우탱 클랜의 천재 프로듀서 RZA였다.



에이셉 라키와 리한나 부부의 첫째 아들 이름이기도 한 RZA



껄끄러이 거칠고 대담한 진또배기 뉴욕 베이스 사운드를 당당하게 들이밀며, 당대를 지배하던 웨스트 코스트 닥터 드레의 펑키하고 파워풀한 베이스 그리고 멀끔한 사운드에 도전장을 내민 RZA, 그는 결국 한 시대를 정의하는 레코드(장르)를 탄생시키고 만다.






르자는 악기 연주도 못하고 음악 이론도 몰랐지만, 어린 시절부터 게걸스럽게 사모은 우유 상자에 한가득 꽂힌 바이닐 컬렉션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마음속으로 그리던 이상적인 연주곡을 위한 밑재료를 부분 부분 썰어 준비했다.





어슷 썰고 깍둑 썰고, 때로는 저미고 다져 넣은 다채로운 DIY 재료와 함께 그는 샘플링의 예술을 선보였다.


그룹의 데뷔 앨범을 준비하면서도 셀로니어스 몽크, 빌 에반스와 같은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의 음반을 디깅하던 그였다.



수업료를 내지 않고 어떤 일에 성공한다는 건 때로 불공정한 일이죠.

저는 힙합에는 수업료를 냈지만, 음악에는 수업료를 안 냈던 거죠.

그래서 음악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 RZA 르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슈가힐 갱’의 음악을 듣고 ‘힙합’하며 살기를 꿈꿨던 아홉 살의 어느 날 이후로 그가 보고 듣고 배운 ‘힙합’이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음악을 총동원해 그것들을 조정하고 새로운 매력을 만들어 가는 역사에 가까웠기에 그는 ‘샘플링’하며 살기로 한다.



Sugarhill Gang



올드 소울 뮤직의 일부를 잘라 트랙 위에 올리고 지겹도록 반복, 복잡한 서정성을 지닌 길바닥 MC가 표현하려는 날 것 그대로의 분위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를 이것저것 믹스, 그렇게 듣기 좋은(?) 불협화음을 만드는 것, 그것이 그의 크리에이티브 최대 숙제였다.





르자는 93년의 데뷔 앨범을 통해 때 묻고 더러운, 맛탱이 간 사운드를 적층해 의도된 먹먹함(?)을 구현했는데, 구석구석 녹이 잔뜩 낀 듯한 로파이 프로듀싱을 그와 함께 작업한 엔지니어 한 명은 르자가 그렇게 뽑아낸 사운드가 너무 참신한 바 그것에 공학적으로 접근해 고유의 매력을 희석하고 싶진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Bobby Digital



우탱의 1집을 무엇보다 더 도드라지게 한 것은 '마샬 아트', '체스'와 같은 프로듀서 르자의 개인적 관심사를 트랙 달리기의 동력이자 스토리텔링의 필수 요소로 활용하면서 힙합과의 시너지를 모색했다는 점인데, 그 결과 우탱 클랜은 미국 힙합 씬에서의 전례 없던 예술 같은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었다.





9살 무렵부터 그룹의 멤버 올 더티 바스타드와 함께 뉴욕의 장르 영화관에서 매주 3편의 쿵후 영화를 연달아 감상할 정도로 지독한 무술 영화 덕후였던 르자는 그것들로부터 얻은 지대한 영감을 토대로 데뷔 앨범에 녹여낼 샘플링 작업을 진행했고, 그렇게 동양 예술의 신비로운 이미지와 뉴욕 힙합을 믹스하는 매혹적인 실험을 전개했다.


물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예상 가능한 지루함 타파!





70년대 미국의 공교육 커리큘럼 속엔 늘 '음악'이 있었기에 아이들은 '꿈'을 꿨다.


하지만 여유 없는 이들에게 악기 연주는 사치였으며, 그래서 1달러짜리 레코드판에 집착했다. 욕심 과다로 적재된 바이닐 더미를 디깅하며 갖고 놀다가 디제잉에 눈을 뜨고(11살의 르자), 믹싱된 소리 위에 흥미로운 언어를 얹어 랩을 했고, 이후 끓어오르는 예술에 대한 사랑과 표현욕에 못 이겨 제대로 음악해 볼 친구들을 소집한다(22살의 르자).


그리고 의도치 않게 역사를 뒤흔든다.


인생의  순간, 좋아하는  그리고 당장   있는 일에 진심을 다한 이들에게 내려주는 하늘의 경사!



Cash Rules Everything Around Me!



내 꿈에 가닿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빠른 길을 택하되, 쉽게 절망하지 않고 나만의 고유한 개성적 시도를 이어가는 일,


진득하게 디깅하며 세상에 널린 좋은 것들 중 더 나은 좋은 것을 보는 눈을 키우고, 끝까지 살아남은 더 나은 좋은 것들끼리 이리저리 섞어,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반전의 매력을 담은 결과물을 선보이는 것,


이것은 르자 삼촌의 질리지 않는 귀한 가르침 그리고 2024, 서른다섯을 까먹은 내가 지독하게 추구해야  태도적 가치가 아닐까 싶다.


르형에게 무한한 감사를!


흑흑ㅠㅠ



[좋은 말로 할 때 듣는 게 좋을 노래]

입문자라면 꾹 참고 모든 트랙을 한 번 다 들어봅시다.



[그리고 함께 읽으면 좋은 포스트]

https://brunch.co.kr/@0to1hunnit/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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