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와 로린 힐 그리고 감히 나
피츠제럴드의 단편 <헤엄치는 사람들 The Swimmers> 속 찬탄을 부르는 문단!
프랑스란 요컨대 그 국토이고,
영국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그 국민이다.
그러나 미국은 샤일로 묘지이고,
미국이 낳은 위인들의 아주 피로해져서 근심에 잠기면서도 기력을 잃지 않는 얼굴이며,
그들의 육체가 보람 없이 죽기 전에 이미 공허해진 하나의 미사를 위해 아르곤의 숲에서 죽어간 시골 청년들이다.
적극적으로 전진해 마지않는 어기찬 심정,
그것이 미국이었다.
피츠제럴드 옹, 어쩜, 존경합니다.
프린스턴 입학을 준비하며 뉴저지주 해컨색에 위치한 뉴먼 스쿨에서 공부하던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
그는 당시 기숙사의 룸메이트(마틴 아모러스)가 벽난로 장식장 위에 올려둔 한 애틀랜타 소녀의 사진을 우연히 보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사진 속 소녀의 이름은 앤(Anne)이었는데, 피츠제럴드는 그녀와 곧장 사랑에 빠져 버린 나머지 일면식도 없는 그녀를 향한 시를 한 편 쓰기도 한다.
언젠가 별들이
장미에 키스할 때
우린 네버랜드에서
만날 거예요.
보랏빛 밤이 찾아오면
당신의 손을 잡고
데려다 줄게요.
사랑하는 앤,
언젠가는, 언젠가는!
1910년대 중반, 그것도 머나먼 미국에서의 일이니까 한 꺼풀의 낭만이나마 씌어 보지만, 요즘엔 이상한 사람이 하도 많고 또 세상 돌아가는 꼴이 워낙 흉흉한지라 우연히 이성 사진 하나 보고 홀딱 반했다면서 냅다 고백해 버리면 돌아올 답이 훤해보인다.
철커덩!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의 나이 서른여섯에 프린스턴 동창 주보에 기고한 글에서 한 인간의 피상적인 습관을 고치는 건 열여덟에도 가능하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강인함과 유약함, 용기와 소심, 엄격함과 부드러움 등의 성품을 가르는 건 대개 유년 시절에 이미 형성되는 폼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결은 이전부터 변함없이 이어진 모양인지 그는 이보다 7년 전, 그의 나이 스물아홉에 발표한 실로 위대한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제1장에서 화자 '닉 캐러웨이'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건네기도 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점잔을 빼면서 말씀하셨고 나도 지금 다시 점잔을 빼면서 말하고 있지만, 인간의 기본적 품위나 예절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게 갖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조금은 든다."
<위대한 개츠비>(김석희/열림원) 중에서
아무튼 그의 말에 따른다면 누군가(성인)의 성격적 결함이나 영 별로인 성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불만한다는 것은 얼마나 헛된 일인가 싶다. 무슨 수를 써도 바꾸기 힘들고 또 고치기 어려울 것이니까.
그렇다면 일상의 습관이나마 교정하여 타고난 기질을 틈나는 대로 억누르는 게 최선의 답이 되지는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쩝.
불안하면 밖을 보게 된다. 사실 순서가 반대다. 바깥을 보면 불안해진다. 나는 나이고, 내가 내 시간의 의미를 정의하고, 또 그 가치를 부여하는데, 내가 내 속도에 맞춰 살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부터 불안함과 죄스러움을 느껴야 하는 건 참 슬픈 일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어떤 일을 이룩하기 위해 내면의 의지를 다지는 일보다, 내 마음 같지 않거나 내 생각과 다른 외면의 소음을 밀어내는 일에 더 큰 에너지를 쓰고 있는 나 자신과 마주할 때면 문득 외로운 기분이 들곤 한다.
최근 애플 뮤직이 100대 명반 순위를 매겨 공표하는 바람에, 그로부터 무려 1위를 차지한 '로린 힐'의 솔로 앨범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1998)을 다시 깊이 있게 감상 중인데, 동명의 곡이 너무 좋아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녀는 말한다.
결국 답은 내 안에 있었고,
내 운명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로린 힐 누나, 어쩜, 정말 존경하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And deep in my heart
The answer, it was in me
And I made up my mind
To define my own destiny
- Lauryn 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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