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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겨울 방학

나만의 도형 그리기

by 스눕피


넌 이미 나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어.
내가 그렇게 둔하지는 않아.

- 피츠제럴드 단편 중에서



2005년의 겨울 방학, 고등학교 배정을 기다리면서 명분 있게 시간이나 때울 겸 단과 학원에 다녀보기로 했다. 학원 프론트에서는 큼직하고 빤들거리는 수강표 찌라시를 나눠줬다. 그것은 옛날 신문의 TV 편성표 같은 얼굴이었고, 그곳엔 과목별 선생님 이름과 강의 주제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저 원하는 과목을 골라, 돈을 내고, 수업을 들으면 그만이었다.


당시 나는 절실함이 많이 부족한 (아직) 중학생이었기에, 잘 못하는 과목을 잘해볼 생각보다는 잘하는 과목을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 <언어영역> 강의를 수강해 보기로 했다. 일종의 선행 학습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강의실을 찾아가 하루 2시간 정도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걸로 끝. 숙제도 없고 질의응답도 없는 아주 지루한 주입식 수업이었다.



첫날부터 선생님은 길고 긴 지문 속 중요 키워드를 구분해 동그라미, 세모, 네모 등으로 표시하면서 글의 구조를 파악하는 연습을 많이 해보라고 강조하셨고, 그것이 이번 수업의 주요한 목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비슷한 방식의 강의와 연습이 한 달가량 지속됐다. 그런데 내겐 그 공부 방법이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쏟아지는 문장의 리듬과 내 생각의 호흡을 최대한 맞춰주는 쉼표 역할을 수행했고, 저 멀리 날아가려는 생각을 붙들어 매면서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의식적으로 집중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는 버릇을 들게 해 줬다.



이후 나는 (누가 뭐래도) 고등학교 3년 내내 언어영역의 지문 위에 나만의 도형 그리기를 즐겼고, 그것은 나의 부침 없이 괜찮던 언어 성적의 기반이 됐다. 시간이 더 흘러 대학 전공 서적을 읽을 때에도,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에도 나는 종이 위에서 가상의 도형 그리기를 멈추어 본 일이 없다. 여기선 세모, 저기엔 동그라미, 여기엔 굵은 네모, 그 위에 작은 별 하나.


돌아보면 20년 전의 내가 단과 학원에서 배운 삶의 교훈이란 아마도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풀어나갈 땐 두 눈에 두 손까지 더해보라는 근면과 협동의 학습 정신 혹은 본능에 이끌려 흐트러지려는 생각을 다잡고 <지금 여기>에 다시 한번 집중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중요성 그리고 나만의 관점을 만드는 나만의 기호 다시 말해 나와의 약속이란 것의 필요성이 아니었을까.


젠장 폼 미쳤다.


2005년의 겨울 방학, 학원으로 가는 길, 따뜻한 버스에 올라 타 30분.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건 SONY의 CD 플레이어 위에서 열심히 돌고 돌던 The Roots의 앨범 <Things Fall Apart>(1999)의 어떤 멜로디들, 퀘스트럽, 스캇 스토치 그리고 딜라의 예술 같은 터치, 두 귀가 새로이 트이는 경지. 오늘이 2025년 1월 1일이니까, 진짜 진짜 20년 전이구나. 그때의 기분을 나만의 도형으로 그려본다면 부드럽고 느긋한 동그라미 하나, 그러나 아쉬운 마음에 흐트러지지 않게 그 위에 선을 하나 덧그려볼 것이다. 조금 더 분명한 모습으로 그때의 기분 좋은 기운이 오래 남을 수 있게.


그리고 뜬금없지만, 한참 게으르고 비겁했던 2024년의 나를 책망하면서, 조금 더 나은 2025년의 내가 되기를, 훨씬 더 나은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본다.


감사합니다.



[새해 첫날 함께 듣고 싶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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