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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견 에세이

취준생이라면 기록으로 증명하세요.

by 스눕피


참견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그리고 남에게 없는
어떤 재능을 갈고닦기 전까지는
누구도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 레이먼드 챈들러


대학 졸업 즈음엔 제법 폼 나는 직업인이 될 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희망과 실체 없는 온갖 상념, 왠지 세상을 다 알 것 같단 환상과 덧없는 계획만 넘실댔다. 행복한 공상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막연한 열망으론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고, 실패한 열망가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어 버릴 거란 예상 가능한 불안감에 우울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무엇도 이룬 바 없는 나의 가능성을 제멋대로 평가하는 팔짱 낀 권위가 진절머리 나게 싫었고, 왜 내가 나를 어렵게 설명하고 친절히 이해시켜야만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피해의식에 고지식까지, 진짜 피곤한 사람이었구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졸업 후에는 짐짓 괴로운 척 태평하게 놀다가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밥을 벌기 위해 일단 일을 시작했다. 이후 몇 번인가 회사를 옮겼고 떠밀리듯 경력이란 것도 쌓였다. 보도자료, IR 자료, 회사소개서, 상세 페이지, 번역, 아티클, 윤문 등 글쓰기와 관계된 곳이라면 어디든 불려 다녔고, 일종의 팔자인지 애매한 포지션으로 채용돼 회사 대표 옆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첫 직장을 관두려던 때, 내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치받아 본가의 거실 식탁에 쪼그리고 앉아 ‘스눕피’라는 필명을 지어냈다. 노트북에 붙어 있던 스눕독 스티커와 당시 즐겨 듣던 빈스 과랄디 트리오의 스누피 앨범이 작명에 100%의 영향을 주었다. 내겐 그저 무언가를 싸지를 공간이 필요했을 뿐, 필명에는 아무 생각이 없던 나였다. 하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아무렇게나 대충 급하게 지어낸 그날의 필명(스눕피) 그 이상의 새로운 닉네임을 나는 생각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필명이 좋을까?


다행히 쭉정이 같던 20대 시절에 들여놓은 독서 습관 덕인지 꾸준히 글을 써나가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독서와 글쓰기는 생각의 들숨과 날숨 같단 생각이 들었고, 나는 이제 그 비중을 맞춰야만 했다. 누구의 허락도 없이 내 맘대로 내 생각을 토해내는 시간, 무려 돈과 교환할 수 있는 글쓰기의 자격과 권한을 만들어 가는 자기 증명의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퇴근 후가 기대됐고, 주말이 기다려졌다. 책에서 말하는 생산적인 삶이란 게 실은 이런 모양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주 스치곤 했다.


블로그 포스트 하나를 올리면 일주일이 지나도 조회수가 10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정말 즐거웠다.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이렇게 재밌고 소중한 것인지 나는 몰랐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회수는 불어났고, 지루한 내 일상 속으로 크고 작은 제안들이 감사히 밀고 들어왔다.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마음에 기분이 쾌했다. 블로그 운영 초기에는 내 이름을 걸고 잡지에 단 한 편의 글만 기고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는데, 사람이란 참 간사해서 그것에 익숙해진 요즘엔 과정의 소중함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징그럽게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나와 마주하게 된다. 글쓰기는 뒷전, 새로운 건수를 찾아 어슬렁거리며 색다르게 인생을 허비해 보려는 애잔한 나의 30대 말이다. 태생적으로 승부욕은 좀 떨어져도, 적어도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과정을 열어 가려는 진지한 향상의 자세를 갖춘 것, 그 하나만은 그럼에도 스스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요즘 자신감이 많이 결여되어서요;;;).


마지막으로 나는 그다지 바쁘지도 않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어서, 이런 제언은 상당히 부끄럽지만, 혹여나 글쓰기 자체 혹은 텍스트 기반의 콘텐츠 제작과 관련한 취직이나 밥벌이를 (막연하게) 준비하는 대학생이나 졸업생이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형태여도 좋으니 1) 사람들과 함께 호흡한 2) 자기 취향을 고스란히 담아낸 3) 무엇보다 꾸준한 글쓰기의 기록을 제발이지 좀 남겨두었으면 한다.


그렇게 하면 멍청한 예전의 나처럼 자신의 강점과 취향을 설명하느라 매번 진땀을 빼지 않아도 되고, 팔짱을 끼고 여러분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람들로부터 쓸데없는 상처를 남기는 못된 평가의 말을 듣지 않아도 좋을 테니까 말이다.


순간의 말은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지만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요. 하지만 시간의 기록은 무엇이든 증명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그냥 (주제넘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서 주저리주저리 궁금하지 않은 제 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아보았네요.


여전히 멀고 먼 길입니다.


저도 한참 모자라네요.


같은 처지의 동료로서


오늘도 함께 힘내보시죠.



[번외] 눈이 가는 브랜드 LII STUDIO


실례합니다만, 느좋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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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연휴에 함께 듣고 싶은 노래

初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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