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닥터 페퍼, 세스 고딘, 세렌디피티
지난 2017년, 10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미국 텍사스주의 ‘엘리자베스 설리번’ 할머니의 장수 비결은 하루 3잔의 ‘닥터 페퍼’였다.
설리번 할머니는 생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나는 약이 아닌 설탕이 필요한 사람”이라면서 “내게 탄산음료의 위험성을 경고하던 의사들이 나보다 먼저 죽다니,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할머니의 부고에서 그녀는 평소 <가족, 친구, 파티, 추리 소설, 이차 방정식, 뮤지컬, 시 쓰기, 닥터 페퍼 마시기, 텍사스 레인저스 야구 경기 시청>을 좋아하던 사람으로 소개되었는데, 그런데, 음, 뭐? 이차 방정식? 언제부터 인수 분해랑 근의 공식 활용이 장수의 비결이 된 거지? 수학은 좀 곤란한데, 쩝.
Anyway 설리번 할머니가 사랑한 닥터 페퍼, 나도 참 좋아한다. 특히, 제로 슈거 버전은 조만간 36년 인생 음료(남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빈 캔을 조금 더 만들어내면, 그때 당당히 내 인생 한번 들먹여 볼 생각)에 등극할 기세다.
함께하는 모든 음식의 맛과 향취를 거침없이 개박살 내는 ‘닥터 페퍼’의 부끄러움 하나 없는 자기주장이 나는 너무 좋다. 그 어디에, 그 누구와 붙여 놔도 곧 죽어도 따로 놀겠다며 떼를 쓰는 그 미친 향미, 그 도라버린 자신감, 너란 음료, 진정 닮고 싶다?
남 눈치나 살살 보면서 용케도 둥글게 유화하며 어울리던 나의 지난날, 아니,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 가속형.
나는 지금껏 그렇게 잘 살아왔고, 내일도 그렇게 잘 살아갈 것이지만, 앞으로 간혹, 아주 가끔씩 저기 저 냉장고 속 ‘닥터 페퍼’처럼 남들 밥맛 좀 떨어지게, 입맛 좀 버리게, 기분 좀 이상하게 만들어보자고 세련되게 다짐해 본다(어딘가에서 나 같은 변태 팬덤이 뒤를 봐줄 거란 믿음으로 조금 더 박력 있게 막 대하기도 하면서).
그런데 당최 이 포스트는 ‘닥터 페퍼’를 찬양하는 글입니까? 까는 글입니까. 도통 모르겠군요. 지금까지 나 때문에 기분 잡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얼마나 가소로울까 싶기도 하면서 말이죠(뭐래, 너 원래 ‘닥터 페퍼’ 같은 놈이었어!).
아무래도 이 정도면 ‘닥터 페퍼’ 까는 글이 맞는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우리의 열정과 사랑이 어쩌면 ‘뭔가 잘 풀릴 것 같다.’라는 막연한 낙관에 기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무엇이 가능한지 알게 되고, 그 길에 집중하고 헌신하며, 그 길은 곧 우리의 정체성이 된다.”
"시간은 연료다. 시간이 없으면 의미도 없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선택을 결정한다."
"일부 일은 당장 보상받지 못하더라도 결국 자산으로 축적된다. 명성과 경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네트워크 같은 자산 말이다."
"견실한 커리어와 유용한 프로젝트는 보상받지 못하는 무수한 순간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세스 고딘의 신작 <세스 고딘의 전략 수업>을 읽고 있다.
좋은 문장 위에 밑줄을 그으려니까, 모든 페이지 위에 밑줄을 긋게 생겼길래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그만두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태만하게 지내던 요즘의 내가 부끄러워져 뜨끔했다.
선생님, 알겠다구요. 정신차리겠다구요! 네?
힘들게 지워내려는 어떤 이름이 어디선가 우연히 들려올 때의 그 당혹감이란?
며칠 전 길을 걷다 아는 동생과 (우연히) 들른 망원동의 한 카페에서 기르는 강아지 이름이 하필 그 이름이었다. 제발!
그런데 심지어 이 강아지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어서 모든 손님들이 그 이름을 연호하며 자기 자리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만!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존 쿠삭과 케이트 베켄세일 주연의 <세렌디피티 Serendipity>(2001)라는 못된(슬픈) 멜로 영화가 떠올랐다.
운명적인 사랑에 관한, 이 말도 안 되는 로맨스 영화 속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하나 나오거든요.
"그 여자와 관련된 일이 계속 일어나. 미용사 이름도 사라, 그 미친놈이 부른 노래도 사라!"
삶을 늘 의도와 의미의 맥락에서 설명하려는 사람은 삶을 경험하는 느낌을 잃고 만다고 어떤 작가가 말했는데요,
사건이 아니라 시간을 경험하는 삶을 좀 살아야겠습니다. 편하게, 느긋하게, 흘러가는 대로 말이죠. 쩝.
■ 오늘 함께 듣고 싶은 노래
■ 노래와 함께 읽기 좋은 포스트(5년 전이라니!)
https://brunch.co.kr/@0to1hunnit/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