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판을 가슴에 품은 소녀 그리고 사요코 또 그녀의 오빠
작년의 어느 날, newyorker.com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CREAM>을 읽고 리뷰한 일이 있습니다. 관련하여 뭐라고 떠들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아서 오늘 다시 해당 포스트를 찾아 읽어봤는데요, 미친놈도 아니고 아주 불친절하게 소설 하나를 거의 통으로 옮겨놨더군요(사실 리뷰보다는 번역에 가까웠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던 모양인지 '스포일링'을 경고하며 '죄송합니다'라고 글문을 연 저의 타고난 비굴함 덕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묘한 감정을 부르는 하루키 특유의 묘한 소설이라서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묘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 KATIE의 이번 앨범 <LOG>를 플레이했다.
작년의 포스트에서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CREAM>을 읽고 난 후의 소감을 위와 같이 밝혔습니다. 묘한 감정을 부르는 묘한 소설이라서 기분이 묘했고, 따라서 가수 KATIE의 앨범을 찾아들었다고요. 그리고 지난 주말, 저는 또다시 newyorker.com에 접속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2020년 2월에 발표한 <With the Beatles>라는 단편 소설을 하나 읽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세 번 읽었는데요, 이유인즉슨 그것의 길이가 짧기도 했거니와 비틀스가 1963년에 발표한 동명 앨범의 어떤 곡들을 주워들으며 소설을 읽다 보니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한 번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약 30년간 쌓아 올린 상상력을 총동원해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수줍은 일본 소녀의 얼굴을 하나 머릿속에 그리고, 남자 주인공의 심정을 멋대로 헤아리며 마음속으로 방정을 떨었습니다.
With the Beatles
소설의 남자 주인공 ‘나’는 1964년의 어느 가을, 학교의 복도에서 한 소녀와 마주칩니다. 10초에서 15초 사이의 그야말로 순간적인 스침, '나'의 선명한 기억에 따르면 소녀는 가슴에 LP판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비틀스의 <With the Beatles> 영국 오리지널 버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졸업할 때까지 ‘나’는 소녀를 보지 못합니다. ‘나’는 어쩌면 그 소녀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연기처럼 사라진 어떤 비전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후 ‘나’는 여러 여자와 만나게 되는데, 비틀스의 LP판을 안고 있던 소녀와 스친 그 화려했던 순간의 폭발적 감정이 하나의 기준점이 되어 작동합니다.
‘나’는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주로 들었지만 파나소닉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던 비틀스의 음악도 들었습니다. 비틀스를 유난히 좋아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요. 아무튼 ‘나’의 청소년기에 비틀스의 곡들을 포함한 여러 음악은 ‘Wallpaper’처럼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음악과 함께하는 삶이었죠.
1965년, ‘나’는 첫 여자 친구, '사요코'와 사귑니다. 그녀의 집 소파에서 첫 경험도 가지죠. 그녀에겐 여동생 하나와 오빠 하나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녀의 오빠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요. 1965년 가을의 어느 일요일, ‘나’는 여자 친구와 만나기 위해 약속 시간에 맞춰 그녀의 집에 찾아갑니다. 하지만 ‘나’를 반기는 건 그녀의 네 살 터울 오빠뿐이었습니다. 그녀의 오빠만 빼고 모두가 외출한 상황인데, 그는 가족의 행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집에 들어가 여자 친구를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그와 여러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쩌다가 그를 위해 소설의 일부분(신경증적이며 우울한 이야기)을 소리 내어 대신 읽어주기도 합니다. 그녀의 오빠는 자신이 '기억'과 관련해 유전성 질병을 앓고 있다는 걸 '나'에게 주저리주저리 고백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여자 친구가 그녀의 오빠에 대해 쉬쉬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요. '나'는 결국 여자 친구를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그녀의 말에 따르면 약속한 날짜가 달랐다는 것이고, 나는 순순히 인정합니다).
18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는 시부야의 언덕길에서 사요코의 오빠와 조우합니다. 그녀의 오빠는 '나'를 한눈에 알아봤고, '나'는 생각 끝에 알아봅니다. 둘은 커피숍에 들어가 사요코는 현재 어떻게 지내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의외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후 사요코의 오빠와 '나'는 헤어집니다.
사요코 오빠와의 우연한 만남, 커피숍에서의 어떤 대화들 그리고 의외의 방향으로 틀어진 사요코의 인생, 1964년에 마주친 비틀스의 LP판을 가슴에 품은 동급 소녀까지, '나'는 생각에 잠깁니다.
뭘 느꼈니?
하루키는 단편 <With the Beatles> 속의 주인공 '나'의 입을 빌려 '문학'에는 정답이 없으며 합리적이지 않은 해석도 결코 '틀린' 것이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단편 <With the Beatles> 속 이곳저곳에 여러 상징을 심어둔 하루키가 '당신의 이 말도 맞고, 저 생각도 맞고, 그 비평도 맞다'라며 독자들을 향해 전문용어로 '선빵'을 갈긴 셈입니다. 제발 좀 까불거나 귀찮게 굴지 좀 말고 당신 식대로 알아서 소화하라는 것이겠죠(하루키 나이가 이제 한국 나이로 72세입니다).
소설을 세 번씩 읽으며 그것을 찬찬히 뜯어보니 저의 머릿속에도 정말로 많은 생각이 오갔습니다. 물론 제 식대로요.
아주 비극적인 뒷이야기를 담은 우울하고 어둡다고 평가되는 소설의 어떤 문장이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인생이란 우연으로 가득한 곳이기에 결국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만 우리의 인생은 전진하거나 성장하거나 후퇴하거나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다가 간다는 것, 음악은 우리 인생의 부분 부분을 잘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고 그렇기에 매 시기마다 우리를 거쳐간 음악들은 구체적인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까지.
단편 <With the Beatles>를 세 번 읽고 나서 저는 우연이란 무엇이고 또 필연이란 무엇이며 그 둘 사이의 차이는 또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인생을 논할 깜냥은 안 되지만, 사실 인생이라는 것도 우연과 필연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일 텐데요, 인간이란 우연뿐인 인생 속에서 조금이라도 속 편히 살기 위한 방편으로 필연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종족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우연과 필연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결과론적인 것이 아겠느냐는 멍청한 생각까지도요. 더불어 무엇이든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우연인 것이고, 필연이라고 생각하면 필연인 것이니 우연이니 필연이니 하는 개념들이 사실은 전부 다 장난에 불과한 건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소설의 시작과 끝에서 우리는 주인공 '나'를 온통 사로잡은 1964년의 그 소녀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한없이 상상하게 됩니다.
가슴에 비틀스의 LP판을 품고 '나'를 스쳐 지나간 찰나의 소녀, 소녀는 어쩌면 '나'의 환상이었을지도 모르고 실존 인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루키가 진짜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각자 품고 있는 어린 시절의 환상과 꿈을 잊거나 잃지 말라는 순수성에 대한 요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한때를 우연히 통과한 노래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리고 우연히 스쳐 지나간 인연들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는 일 말이죠. 우리는 언제 어떻게 우연히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우리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지난날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우리는 모두 학창 시절의 우리를 온통 휘감은 각자만의 소중한 '소녀'를 한 명씩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 하루키는 꿰뚫어 본 듯해요. 그나저나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듭니다.
[소설 읽기]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0/02/17/with-the-beatles/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