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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보이스톡

서독에서 온 전화 & 눈물 콧물 쏙 빼는 스티비 원더

by 스눕피



새벽의 보이스톡


금요일 새벽 4시 22분,


출근이 날 기다리고 있지만, 기고 마감 시간 앞에서 밀려오는 잠을 꾹 참아가며 억지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는데, 때마침 유럽에 살고 있는 대학 후배로부터 뒤늦은 카톡 답장이 왔다.


그깟 시차 따위 가볍게 박살 내듯 칼답으로 응수해 줬더니, 대체 이 시간에 안 자고 뭐 하냐면서 오랜만에 통화나 하자고 권하는 그녀에게 지체 없이 보이스톡을 걸어버렸다.


재지 않고 실천하는 나는 개쿨남이니까.



이 시간에 뭐 해?


나? 뭐 좀 쓸 게 있어서.


아직도 계속 글 쓰고 그러는구나.


응.


넌 어떻게 살아?


나는 독일에서 재택근무 중이야. 스웨덴 친구 만나고 있어. 오빠는 결혼해? 우리 오빠는 10월에 결혼하는데. 둘이 동갑이잖아.


나? 나는 망했지.


오빤 여전하네.


응, 너도 여전해.



거기 사람들은 어때? 너 MBTI 뭐였지?


여기 사람들은 적당히 욕심부리고, 적당히 일하면서, 적당히 살아. 내가 생각보다 그렇게 욕심이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닫고 있어. 난 지금이 좋아. 근데 오빠가 MBTI 물어보니까 왜 이렇게 어색하냐.


그런가? 왜? 그건 그렇고 너 되게 행복한 것 같다. 그리고 진짜 리스펙이야. 무슨 연고가 있어서 간 것도 아니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이야.


그리고 이어진 대학 얘기, 인간관계 얘기, 대통령 얘기, 정치 얘기. 졸졸졸 쫄쫄쫄 시간이 흐른다.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쓸만한 소재를 탈탈 털어 주절주절 떠들다 보니까 창밖으로 여명이 밝아왔다.



한번 놀러 와. 거실 내어줄게. 남자친구도 소개해줄게.


응, 진지하게 고민해 볼게. 우선 나는 잠을 좀 자야겠어.


잘 자.


그래, 또 연락하자.


통화 종료.


1시간 31분.


타국에서 행복하고 평온하게 잘 살고 있는 후배의 모습에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 아무 문제 없이 잘 살면 된 거지.


그거면 됐지.



나는?


나는 행복한가?


음, 우선 잠을 좀 자야겠어.


당장은 그게 행복인 것 같아.


어떤 유명 작가가 그런 유언을 남겼다지.


아, 다 모르겠고, 일단 잠이나 푹 자야겠다고.


음, 저건 단순한 유언이 아니야.


가슴을 울리는 명언이야.




운명적 창작 동맹



결혼했을 땐
친구보다 멀었고,

이혼한 후에
더 가까운 친구가 됐다.



1970년 9월, 스티비 원더 Stevie Wonder는 그의 나이 스물에 첫 번째 결혼을 했다.


상대는 네 살 연상의 보컬리스트 사이리타 라이트 Syreeta Wright.


둘의 협업으로 탄생한 대표적인 띵곡은 <If You Really Love Me>와 <Signed, Sealed, Delivered I’m Yours> 가 있다. 개굿!


모타운에서 비서로 근무하던 사이리타는 레이블의 설립자 베리 고디로부터 백업 보컬로 발탁되어 음악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후 스티비 원더와 만나 작사, 작곡을 함께하는 음악 파트너가 되었다.


하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은 18개월을 함께 살았고,


1972년, 스티비 원더의 순수 사랑 찬미 앨범이자 그가 본격적인 앨범 아티스트로 도약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작품 <Talking Book>(1972) 녹음 도중 이혼하게 되었다.


사이리타 라이트와 스티비 원더의 사랑과 기쁨 그리고 상처의 정서적 기록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띵반이다.


그러나 스티비 원더는 이혼 후에도 그녀의 솔로 커리어를 적극 지원했다.


데뷔 앨범과 후속 앨범을 프로듀싱했고, 무려 1990년대까지 음악적 협업을 이어갔다.


사랑을 넘어 우정으로,


운명적 창작 동맹으로서.


꿀맛 가득한 띵반. 블로그 포스트를 마무리하면서 앨범 수록곡을 몇 번이나 추천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기억이 안 난다. 너무 많은 글을 써버렸다.


2005년, 스티비 원더는 마지막 정규 앨범 <A Time to Love>를 발표했고, 2004년 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사이리타에 대한 헌정곡으로서 "Shelter In The Rain"이라는 노래를 공개했다.


그런데, 그 가사가 말이죠.


눈물 없인 못 읽어줄 정도예요.


흑흑ㅜㅜ


슬픔이 너무 깊고,
그보다 더한 고통이 닥칠 때,

먼저 기대고 싶은 사람조차
떠오르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도
손 잡아주는 이 하나 없을 때,

그 모든 아픔 속에서
내가 너의 숨 쉴 틈이 되어줄게.

빗속에서도
너를 감싸는 지붕이 되어줄게.

네가 내게 무엇을 부탁해도,
내가 못해줄 일은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날 믿어줘.
내 사랑이 끝까지 널 이끌어줄 테니까.

마지막 촛불마저
깜빡이다 꺼지고,

“왜 하필 나야?”라는
생각밖엔 떠오르지 않을 때,

모든 기쁨이 사라지고
앞날이 온통 흐릿해져만 갈 때,

그 아픔 속에서도
내가 너의 위로가 되어줄게.

비 내리는 세상 속에서
너를 위한 쉼터가 되어줄게.


데모와 백업 보컬을 전전하며 연이은 좌절 속에 주눅 들어 있던 피츠버그 출신의 무명 가수 '사이리타 라이트'의 눈앞에 운명처럼 나타난 스티비 원더.


그는 그의 천재성을 잃을까 우려하던 모타운의 수장이 직접 전례 없는 창작의 자유를 허락한 레이블의 핵심 아티스트였고, 둘은 깊은 음악적, 정서적 유대와 함께 서로를 돕고 도우며 예술적 진화를 이룩했다.


개.간.지.


운명의 교차점, 음악적 축복의 순간.


결과를 알기에 슬프지만,

결과를 알기에 아릅답다.


별 볼 일 없는 삶이지만,


그래도 나를 이만큼이나마 성숙하게 한,


나를 스쳐 간 모든 소중한 이들에게


문득 감사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인생이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있다는 말, 그 말이 참 지지리도(?) 맞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엔 대체 왜 틀린 말이 없는 걸까요?


왜!


아무튼 스티비 옹, 원더 옹!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 오늘 함께 듣고 싶은 노래

https://youtu.be/27JwU9fox4M?si=V9z1rRDTNIJ_1qpD

쉘터 인 더 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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