챈들러와 헤밍웨이 그리고 Jeremih의 <Birthday Sex>
인간은 자기 확신이 부족해질 때, 무언가에 관해 열심히 쓰기 시작한다고 했다.
북받칠 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펜 하나 들고 써 갈기는 일 뿐이었던 시절을 살던 어떤 작가의 예스러운 이야기 같긴 하지만, 시간을 초월해 인간의 창작 관점에서 저 말을 곱씹어보면, 그것의 뿌리라는 게 결국 근본적으로 우리 내면에 있고, 단단히 굳지 못해 방황하는 마음의 어떤 불안감이 생각의 뚜껑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말이 될 거다.
언젠가 챈들러는 '잠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한 헤밍웨이의 집착적 묘사에 관해 이렇게 빈정댔다.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그의 묘비명은, 그가 받아 준다면 말이지만, 이렇습니다.
“여기 잠자리에서 끝내 줬던 한 남자가 잠들다. 그가 여기 홀로 묻히다니 정말 유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과연 끝내 줬을까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는 건데, 정말로 잘하는 일에 그렇게까지 공을 들이지는 않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중에서
진지한 남성성을 추구하던 전설의 마초맨 헤밍웨이 옹께서는 잠자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과도하셨던 걸까, (다소 실망스럽지만) 자기 확신이 조금 부족하셨던 걸까.
도무지 당장 알 길은 없지만, 확실히 지금 듣고 싶은 노래가 (정말 뜬금없지만) 하나 있긴 하다.
찐한 사랑을 기대하며 불러 보지만, 빠른 이별을 부를 뿐인 전설의 Sex Song, Jeremih 제레마이의 “Birthday Sex”.
열정 찾고 있다고? 이미 찾은 것 같은데?
초도, 케이크도 필요 없어. 너의 몸 하나면 돼.
항복? 그런 거 없어. 끝까지 가는 거야.
벌써 몇 시간 짼데, 아직 부족하지?
주방도 좋고, 식탁도 괜찮아.
넌 나 알잖아? 그냥 ‘잘’ 하는 정도가 아니란 거
<Birthday Sex> 가사 중에서
제레마이는 한 인터뷰를 통해 이 노래 가사에 얽힌 비하인드를 밝힌 적이 있는데,
시카고 컬럼비아 칼리지에 다니던 중 전공 필수 과목으로 선택한 <시 창작> 클래스에서, 억지로 글을 쓰다가 횡재하듯 건진 시적인 문장들을 모아 노랫말로 만들다가 탄생한 노래 중 하나가 “Birthday Sex”였다는 스토리가 그것이다.
음?
수업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까?
생일을 맞은 연인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야 말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가득한 가사는 솔직히 좀 웃기지만(안 그런 척하지만 표현이 너무 급하고 직접적이다 보니 어느 포인트에서 섹시함을 느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제레마이의 성대에 탑재된 천연 오토튠 기능(실제로 노래 속에서 오토튠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의 놀라움과 슬로우 잼의 템포를 타고 흐르는 그의 감각적인 에너지는 확실히 좀 섹시하긴 하다.
“당시엔 캠퍼스를 돌아다녀도 아무도 내가 그 노래를 부른 사람인 줄 몰랐어요.
뮤직비디오를 안 찍고 있었거든요."
2009년 2월, Def Jam 데프잼 레코즈를 통해 발표된 이 노래는 마이스페이스와 유튜브를 통해 크게 바이럴 되었고, 이제는 어느덧 200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섹슈얼 알앤비 송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는 밝힘과 은폐 사이의 경계에서 살아간다.
어딘가에선 누군가와 몰래 감정적으로 도발하고, 속삭이고, 농담도 하지만, 보통의 경우엔 불안하고 부끄러워서 일부러 숨기고, 감추고, 지우고 그런다.
그런데 인생의 재미란 역시 밝힘과 은폐 사이의 그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 숨어 있지 않나 싶고, 거기에서 건강한 욕망도 생겨나고 예쁜 사랑도 커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헤밍웨이의 창작 활동을 비꼬던 챈들러의 말이 틀린 것도 없지만,
이 세상에는 (매우 드물고 귀하지만) 자신이 잘하는 일에 미친듯한 정성과 공을 들이고, 그것을 질리지 않고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우리는 보통 그들을 '장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가 관상 좀 볼 줄 아는데,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무리 봐도 제레마이는 그쪽으로는 장인 같아 보이질 않는다. 쩝.
부디 생일에는 잘하세요!
■ 오늘 함께 듣고 싶은 노래
https://youtu.be/JGbOuZww14g?si=rWnDQAX6r1cZHS-X